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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B

by 민지쿠

나는 계획을 짜는 것을 좋아한다. 출근할 때면 퇴근 후 저녁에 무엇을 먹을 지, 저녁을 먹고 나면 어떤 활동을 몇시에 몇시간 동안 할 지, 그리고 나서 샤워를 하고 잘 것인지, 집정리를 간단하게 하고 잘 것인지, 몇 시에 잘 것인지를 핸드폰 메모장에 세세하게 기록하는 타입의 인간이다.


하지만 나에게 약간 모자란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세운 계획을 달성하는 것. 계획을 세우는 것에는 흥미가 있지만 막상 그것을 100프로 실현하는 것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오히려 변수가 생겼을 때 그 변수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는 것을 더 즐기는 것이다. 이 속성은 즉흥적인 성향의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언제나처럼 여행을 떠나기 전 구글맵에 해당 지역의 명소들을 표시해놓고, 맛집을 찾고,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하고, 동선에 맞춰서 날짜별 게획을 촘촘하게 다 세운 뒤(운전을 하게 되면 스트리트뷰로 운전 예행 연습까지 한곤 한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즉흥적인 친구의 의견에 따라 끊임없이 계획을 수정해버린다. 계획을 좋아하는 이 인간은 계획을 세우는 단게에서 이미 많은 정보들을 습득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플랜 B를 즉시 생각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신입사원 때 가장 괴로웠던 일은, 역시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었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데 몰두하는 인간 치고는 사소한 실수들을 잘 저지르는 편인데, 메일을 꼼꼼하게 다 써놓고 첨부 파일을 빼놓고 보낸다거나, 정산 내역서를 열심히 작성해서 계산 실수가 없는지까지 모두 확인한 후 마지막 마무리에서 삐끗하는 식이다. 그 외에도 정말 자잘하지만 수습하려면 꽤나 골치가 아픈 실수들은 계속해서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나는 엄청난 자책감으로 괴로워졌다. 물론, 한 번 했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일을 하면서 실수를 범할 수 있는 구석이 이렇게나 다양할 수 있는지 아직도 새삼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실수하는 내가 너무 괴롭고 이해가 안된 나머지 어느 날은 '지뢰찾기를 하는데 모든 지뢰를 다 밟아가면서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느낌'이라고 짧은 심경글을 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 나는 그만 '실수하는 나'에 익숙해져 더 이상 잔실수에는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해준 마법의 주문이 바로 '플랜 B' 였다. 어떤 실수도 수습해낼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인 이 '플랜 B'를 발견한 순간,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실수에도 괴로워하지않는 이 시대의 참 직장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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