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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공부, 교재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었다

by 라일락향기

도쿄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일본어 문장을 단 한 줄도 자연스럽게 말하지 못했다.
JLPT N2는 이미 따놓은 상태였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머리로만 아는 일본어였고, 그건 현실의 언어가 아니었다.

처음엔 어학원에 등록했다. 하루 3시간씩 수업을 듣고, 교재의 회화 표현을 줄줄 외웠다.
“~てもいいですか?”, “~てくれて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같은 예문들을 따라 읽으며, 나는 점점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수업을 마친 후였다.
편의점에서 뭔가를 묻는 점원이 너무 빠르게 말하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파트 관리소에서 벽 보수 일정 공지를 받았을 땐, 아예 단어 하나를 못 알아듣고 ‘네’라고만 했다가 낭패를 봤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나서,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지역 커뮤니티에서 주최하는 ‘일본어 교류 모임’에 우연히 참가하게 된 것이다.
거기선 일본인 대학생과 유학생이 자유롭게 섞여 대화를 나눴다.
틀리면 웃고, 발음이 어색하면 장난을 치는 분위기였다.
어떤 할머니는 내가 ‘도이츠(독일어)’를 ‘도이츠’가 아닌 ‘도이치’라고 말한 걸 듣고 빵 터지셨다.

그날 이후, 나는 교재를 펼치는 대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트 계산대에서 “袋(ふくろ)は大丈夫ですか?”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이게 바로 교과서엔 안 나오는 진짜 일본어구나’ 하고 깨달았다.

일상 속 일본어는, 틀려도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몸으로 익혀졌다.
아침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식사를 준비하거나, 드라마 자막을 켜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뉘앙스를 느끼는 감각이 생겼다. 그게 말의 첫걸음이었다.

교재는 기초를 잡아주는 나침반일 수 있다.
하지만 언어는 결국 '살면서' 익혀야 했다.
내가 일본어를 진짜로 말하게 된 건, 누군가의 말에 웃고, 당황하고, 공감한 순간들이 쌓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완벽한 회화는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겁내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만 있다면, 일본어는 계속 내 것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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