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정교한 생활기기들
처음 일본에 와서 자취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예상보다 훨씬 작은 집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 들어앉은 또 다른 ‘작은 것들’이 있었다.
냉장고, 전자렌지, 세탁기, 청소기…
모두 한국에서 봤던 것보다 한 치수쯤 작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다고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딱 좋다’는 감각이 들었다.
전자렌지 – ‘굽는’ 것보다 ‘데우는’ 것에 진심
일본 전자렌지는 기능 자체가 단순하다.
구워내거나 오븐 기능을 겸하는 제품도 있지만,
많은 가정에서는 “데운다”는 기능에 집중된 기기를 쓴다.
그리고 그 데우는 방식이 꽤 섬세하다.
음식을 과하게 데우거나 가장자리가 타는 일 없이
시간과 출력이 정밀하게 조절된다.
일본식 도시락 문화에 꼭 맞춘 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 – 적은 물, 작은 공간, 그리고 나만의 시간표
일본 세탁기의 대부분은 드럼보다는 상단 투입형이다.
크기는 작지만 하루의 빨래를 돌리기에 딱 좋다.
특이한 건 대부분 ‘예약 세탁’ 기능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출근 전 맞춰놓으면 퇴근 즈음에 딱 맞춰 빨래가 끝나 있다.
게다가 물 사용량이 극도로 절약되어 있어,
이 작은 기기 하나에 ‘절제’와 ‘기능성’이 모두 들어가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청소기 – 소음보다 예의를 택한 설계
일본 청소기는 유독 ‘조용하다’.
밤에도 부담 없이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소음이 억제된 제품이 많다.
청소기마저 이웃을 배려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상생활 전반에 스며든 일본인의 정서가 느껴졌다.
게다가 일본 제품은 버튼 하나하나에도 직관성이 있다.
어떤 기능인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고,
동작음과 함께 작동 상태를 알려주며
사용자를 ‘불편하게 두지 않으려는’ 배려가 곳곳에 배어 있다.
‘작고 정교한 것’이 오히려 여유를 만든다
한국에서 살 땐
‘기능 많은 게 좋다’, ‘성능 세고 큰 게 편하다’는
어떤 암묵적인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불필요한 과장이 없다.
일상의 중심은 언제나 ‘생활하는 사람’이고,
가전제품은 조용히 그 곁에 놓여 있다.
그렇게 작지만 섬세한 도구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생활도 단정해지는 것 같다.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줄이며,
조금 더 세심하게 나의 하루를 챙기게 되는 감각.
일본의 가전은 단순히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
내가 몰랐던 ‘여유’를 새롭게 배우게 해주는
하나의 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