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학습’과 ‘자율 독서’의 일상
도쿄에 살면서 처음 여름방학을 맞이했던 해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무더위가 시작되던 7월 중순,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얇은 과제 노트 한 권과 함께 당부의 말을 남깁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하면 됩니다.”
그 순간 조금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라면 방학이 시작되기 무섭게
학원 등록, 계획표 작성, 단기간 완성 프로젝트가 돌아가는데,
여긴 어딘가 조금 달랐습니다.
긴 방학, 짧은 과제
일본의 여름방학은 보통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약 5~6주로 꽤 길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방학 숙제는 단출합니다.
‘매일의 일기’, ‘자율 과학 실험’, ‘자기 주도 독서록’ 정도.
이 모든 것이 실제 생활과 연결되어 있지요.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숙제는 아이가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돌아보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습관처럼 매일 일기를 쓰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천천히 읽고,
어디론가 가족 여행을 떠나 경험을 채워옵니다.
학원이 없는 방학?
놀라운 건 방학 동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드물다는 점입니다.
물론 중고등학생이 되면 학원이나 보습 학원(주쿠)에 등록하는 경우도 있지만,
초등학교 시기엔 ‘놀이와 경험’이 방학의 핵심입니다.
엄마 친구의 아이는 방학 내내 아빠와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고,
또 다른 아이는 할머니 댁에서 매일 텃밭을 가꾸며 여름을 보냈습니다.
이런 일상이 결국 학교 숙제의 일기와 관찰기록으로 이어집니다.
아이들에게 방학은 ‘쉴 수 있는 시간’이면서도, 자기 삶을 주도해보는 시간인 셈이죠.
도서관과 공공시설의 역할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일본의 도서관과 공공시설의 적극적인 활용입니다.
여름방학이면 지역 도서관은 독서 스탬프 이벤트,
공공과학관에서는 자율 탐구 워크숍이 줄줄이 열립니다.
이런 공간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답을 찾아가는 배움터로 기능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그대로 방학 숙제에 담기기도 하죠.
“책을 많이 읽었어요”보단,
“이 책이 왜 재미있었는지 설명해 주세요”라는 질문을 먼저 건넨다는 점,
그게 일본 교육의 다른 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의 역할도 ‘코치’ 수준으로
일본 부모들은 방학 기간 동안
아이를 ‘관리’하기보다는 ‘코칭’하려는 태도가 강합니다.
매일 스케줄을 짜주기보다는,
“오늘은 뭘 하고 싶어?” “어제는 뭐가 재밌었어?”
이런 대화를 통해 아이 스스로 계획하고 되돌아보도록 유도합니다.
아이에게 권위를 내세우기보단,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놀고, 가끔은 함께 멍하니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정리하며 – ‘속도’보다 ‘깊이’를 배우는 시간
처음에는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었던 일본식 방학 문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은 속도보다 깊이와 경험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숙제는 많지 않아도,
그 숙제를 바라보는 아이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고,
놀이처럼 여겨지는 활동 하나하나가
자기 주도성과 성장을 위한 ‘작은 씨앗’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의 시간은, 어른보다 천천히 흘러가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일본의 아이들은
방학을 통해 ‘배움’ 그 자체를 다시 만나고 있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