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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들이여, 일어나자! 그러다 다시 누워 잘 쉬자

'내향인 깃발' 기수님 / 심리학관

by 심리학관

'방구석에서 귤 까먹고 싶은 사람들 모임',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 '류정한 기작 소취 모임',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 '야구로만 화내고 싶은 전국 야구팬 연합 고척스카이돔지부' 등등. '깃발 보러 집회 간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윤석열 탄핵 광장에 기상천외한 깃발들이 나부꼈다.


화려한 깃발들 사이 조용하고 단출한 '내향인 깃발'도 그렇게 등장했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을 뜻하는 '내향인'. 주말이면 어김없이 집회에 나타난 깃발을 보고 사람들은 느꼈다. '내향인도 광장에 나올 만큼 엄중한 시국이구나…'


또 하나의 2030 여성인 '내향인 깃발'(활동명)을 지난 3월 30일에 만났다. 그가 가장 자주 출몰한 광장인 서울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였다.


-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94년생이고 '내향인 깃발' 기수입니다.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며 권력에 맞서서,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광장에 나가게 됐습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놓지 않으려는 편인데요, 그 순간 떠오른 게 바로 깃발이었어요. '내향인들도 화가 나서 더는 집에 있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깃발을 들고 광장에 나가게 되었죠. 처음엔 개인적인 표현이었지만, 지금은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위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된 것 같습니다."


비상계엄 직후 첫 주말이었던 지난해 12월 7일, 깃발은 처음으로 광장에 섰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이었다. 그 후로 주말이면 광장에 서는 그는, 자신을 향한 시민들의 환대를 또렷이 기억한다.


"웃으면서 재밌어하셨어요. '내향인이 깃발까지 만들어서 나왔다고?' 하시면서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남태령에서부터 시작된 행진이 한강진에서 끝났던 지난해 12월 22일에 만난 50대 남성이다.


"내항인이 무슨 뜻인지 여쭤보시더라고요. '소심하다는 뜻이에요'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조심하라고? 윤석열 보고 조심하라고?' 하셔서 의도치 않게 예고장을 보내게 될 뻔했습니다.(웃음) 그 뒤에는 뜻을 알아들으시고는 깃발을 잡은 두 손을 감싸주시면서 '내향인 중에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이네'라고 하셨어요."


행진을 마치고 나면 자기도 모르는 새 주머니에 수북한 사탕과 간식거리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I'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이리라, 그는 짐작한다.


"저를 포함해 '내향적인 여성'들은 사회에서 '순종적인 사람', 혹은 '충동적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 같은 모습을 강요받잖아요. 저는 거기에 반하는 깃발로 그걸 깨부수고 싶었어요. 여성들이 여태까지 하지 못했던 말들을 깃발 안에 담아서, 하나의 시각적인 매개체로 삼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어느 순간 깃발이 '나'이고 내가 '깃발'이라 여긴다는 그는 '내향인'에 관한 세간의 통념을 거부한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지만, 광장과 록페에서도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찾는 데 특화된 사람이기도 하다.


비슷한 성향의 내향인들에게 그는 "내향인들이여, 일어나자! 그러다 다시 누워 잘 쉬자… 그리고 다시 일어나자!"라는 말을 전했다. 윤석열의 파면을 가정하고, 그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주말에 집에서 끝내주는 잠을 자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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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엄중하구나"...

매주 등장한 이 깃발에 사람들이 보낸 찬사

[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③]

광장의 기수가 된 '내향인'

이슬기 기자님

오마이뉴스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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