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비정규직인 네가, 어디 우리 자릴 넘봐

딴지일보 / 심리학관

by 심리학관

2021년, 고용노동부는 지상파 방송 3사(KBS, MBC, SBS)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한다.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프리랜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노동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방송 작가들의 업무 형태가 밝혀지게 되었다.


시간과 장소가 자유로워야 하는 프리랜서지만, 대다수의 작가가 정규직 직원이 쉴 때 쉬지 못하고(연휴, 방송사 창립일 등) 출근하는 상근직임이 밝혀졌고, 정규직 PD처럼 방송사의 지휘·감독 하에 업무를 수행하지만, 근로기준법상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방송작가라는 직군이 생긴 지 50여 년 만에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노동부는 방송 3사를 상대로 방송작가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고 즉시 처우 개선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이에 방송사들은 방송작가를 ‘무늬만 프리랜서’에서 ‘무늬만 정규직(이라 쓰고 계약직으로 읽어야 함)’으로 포장지만 바꿨다. 사회 부조리는 밝혀도 사내 부조리는 묵시하는, 내로남불로는 타 직군의 추종을 방불케 하는 방송사들이 내놓은 대안이었다.


노동부 근로감독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방송작가는 152명. 이 중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사례는 불과 18명이었다. 이 사건으로 방송국을 떠난 작가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들은 프리랜서 때보다 오히려 임금이 줄어듦과 동시에 정규직보다 처우가 현저히 떨어지는 ‘방송 지원직’이라는 이름을 단 1년짜리(연장하면 최대 23개월 근무) 비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KBS는 방송 지원직 근로계약서에 ‘계약 해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KBS는 “근로자가 근무를 태만히 하거나 근무 성적이 불량한 경우”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계약 해지는 사실상 해고를 뜻하며, 일반 직원 근로계약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방송 지원직은 기존의 막내 작가들이 주로 맡게 되는데, 실제로 작가가 맞지만 ‘작가’라는 이름이 없어졌기 때문에 방송사로서는 오히려 부려 먹기 더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방송 지원직 외에도 리서처라는 이름으로 막내 작가를 뽑기도 하는데, 이들이 기존 작가 업무 외에 행정, 정산, 연출 보조, 손이 모자란 날에는 FD 업무 등 온갖 잡무를 도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기가 차서 입이 안 다물어졌던 기억이 난다.


방송 지원직은 사회 초년생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부당한 처사임에도 부당한지를 모르고 일한다. 그러다 23개월 계약이 만료되고 짤없이 쫓겨난 후, 방송국 문을 열고 박차고 나오면서 느낀다. 내가 방송국 놈들에게 제대로 당했구나, 하고 울분에 차게 된다.


그렇다면 방송국은 작가들에게 대체 왜 이러는가?


<태생부터 비정규직>

작가가 정규직이 되면 필연적으로 기존 일반 정규직(PD, 기자 등)들의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 채용에서 파이를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카르텔을 깨는 것이다.


그 꼴을 볼 수 없는 정규직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어디 태생부터 비정규직인 작가가 우리 자릴 넘봐.’

‘꼬우면 너희도 공채 치고 들어와!’…

작가직 공채가 있어야 시험을 치지?

좀 줘라 줘.


아무튼 예를 들어 시사 방송을 제작한다고 치자. 필수 인력은 PD, 기자, 아나운서(앵커), 그리고 방송 작가다. 방송의 A TO Z(오프닝부터 클로징까지 수십 페이지에 걸쳐 원고 작성)를 구성하는 건 작가다. 즉, 작가 없는 방송은 상상할 수 없지만 이 구성원 가운데서 유일하게 작가만 비정규직이다.


얼마 전, 방송작가의 정규직화 내용을 담은 기사에서 속이 쓰린 댓글을 봤다. 댓글러는 방송계를 잘 모르는 사람 같긴 했는데 이런 댓글이었다. "작가는 비숙련직이라서 그런 거 아니냐, 어떻게 세상에 모든 직군을 정규직 전환할 수 있냐"라고 했다.


모든 인원이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직군을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업무적 역량이 발전하지 않는 업무이므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편견 서린 댓글이었다. 이게 방송작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감히 자신 있게 말하건대, PD가 전문직이면 작가도 명백한 전문직이다.


이 모든 원흉은 출발선이다.

지금은 방송국에 여성 PD들도 많지만,

50년 전 방송작가라는 직군이

처음 생겨날 때만 해도

작가는 여자, PD는 남자였다.

방송사는 남자인 PD는 정규직,

작가는 프리랜서로 구분했다.


애초에 같은 출발선에 설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차별로 시작된 두 개의 선은

시간이 지나도 마주칠 일이 없었고

지금까지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작가들이 목소리를 내면

오히려 차별은 공고해졌다.

유리천장은 건재하다.


이런 반박이 나올 수 있겠다. 방송작가는 비정규직인 대신 여러 프로그램을 맡으며 겸직할 수 있지 않냐고. 앞서 말했듯, 상근이기 때문에 겸직하지 못한다. 아울러 겸직할 수 있는 이른바 탑 작가, 왕 작가는 상위 1%의 극소수다.


아나운서 직군처럼 기본적으로 정규직이 존재하고, 당사자가 원하면 프리로 활동할 수 있는 ‘투 트랙’ 구조가 필요하다. 정규직과 프리랜서가 병존하는 분야에서는 최소한의 선택권이라도 주어지지만, 방송작가는 태생적으로 프리랜서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제약 속에 놓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이미 불평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인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고용 구조 속에서 인정받는 ‘근로자’가 아니라,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외주 인력’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앞서 아나운서를 예로 들었지만, PD도 정규직 PD가 있고 프리랜서 PD가 있다. 카메라 감독의 경우 정규직보다 프리랜서 활동이 훨씬 수입이 높기 때문에 프리랜서를 원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다(프리랜서 타이틀을 단 방송 작가들의 급여가 후려쳐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모순된다). 이렇게 두 가지 옵션이 주어져 있는 상태지만 작가는 정규직화를 주장했다가 오히려 작가 타이틀마저 떼어버리는, ‘방송 지원직’이란 또 다른 불평등 계약직이 만들어졌다.


<혐오스런 "그녀들">

사내 계급으로 따지면 불가촉천민인 방송작가에 대한 노골적인 인식이 드러난 게 최근 MBC 사태다. MBC 정규직들이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직장 이메일을 인증해야만 가입 가능)'에서 방송 작가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MBC 게시판 캡처


그들은 편법 해고된 작가들,

소송을 거쳐 복직한 작가들을 "빈대"라고 부르며

낄낄대고 있었다.


방송 작가들은 대부분 여성이기에

"그녀들"이라고도 부르면서,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과자를 밥 먹듯이 먹어 찐 살",

"휘핑크림 탑 쌓은 음료 마시며

주체 못하는 몸뚱이" 등

여성작가를 비하하는 내용이 난무했다.


누가 봐도

방송 작가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부디, 방송작가 처우 개선에 대한 국회의 의지가 발현되길 바란다. 의장이 나선다고 모두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걸 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걸어본다는 의미다.


프리랜서 외에는 어떤 형태의 고용도 허용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방송 작가들은 늘 불안을 운명처럼 여겼다. 노력의 질과 결과가 아무리 뛰어나도 제도 바깥에 머물게 된다는 사실은 작가들의 노동과 가치를 왜곡시킨다.


‘누구나 노력하면 된다’는 말이

이토록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방송작가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반드시 바뀌어야 할 때다.


방송작가가 만만하냐3 :

제도 밖 그녀들, 우리가 빈대라고?

작가A

딴지일보

202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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