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때는 알것 같았는데, 내 상황에는 적용이 안돼요

배수정 인지심리학 박사님 / 심리학관

by 심리학관

배움에는 이상한 순간이 있습니다. 아예 모를 때는 괜찮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런데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영역에서 갑자기 안개가 끼는 순간이 있습니다. 단어는 들리는데 문장이 안 되고, 앞에서 뭘 놓쳤는지도 모르겠고, 다시 들어도 같은 지점에서 막힙니다.

2주 전에 맥북을 샀는데, 사려고 사양을 비교하던 중 제 스스로를 돌이켜봤을 때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순간 아노미 상태에 빠진 듯 하더군요.

학습 곡선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계단식 그래프를 떠올립니다. 평평하게 가다가 어느 순간 확 오르고, 다시 평평해지는 패턴입니다. 그런데 이건 아웃풋의 변화(시험 결과, 퀴즈 등)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계단을 오르기 직전, 평평한 구간에서 학습자의 머릿속은 어떤 상태일까요. 밖에서 보면 정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뒤섞이고, 기존 틀로 해석하려는데 안 되고, 새 틀을 받아들이자니 저항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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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에서는 이 상태를 리미널리티(liminality)라고 부릅니다. 리미널리티는 원래 통과의례 연구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성인식을 치르는 청소년을 떠올리면 됩니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상태입니다. 이전 정체성에서는 벗어났는데 새로운 정체성은 아직 획득하지 못한 문턱 위의 시간입니다.

라틴어 'limen'이 문턱이라는 뜻입니다. 방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문지방 위에 서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불안하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변화가 일어나는 유일한 지점이라고 합니다.

Meyer와 Land(2003)는 이 개념을 학습에 가져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문턱 개념(threshold concept)'은 한번 이해하면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는 개념입니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 물리학에서 엔트로피, 프로그래밍에서 재귀 같은 것들입니다. 이해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한번 넘으면 돌아갈 수 없는 상의 변화 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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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 개념 앞에서 학습자는 리미널 상태에 빠집니다. 이해한 것 같다가 다시 모르겠고, 알 것 같다가 또 헷갈립니다. 연구자들은 이걸 'oscill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혼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동입니다. 계단식 곡선의 평평한 구간, 그 안쪽 풍경입니다.

리미널 상태의 특징 중 하나가 'mimicry'입니다. 흉내내기입니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해한 척하는 겁니다. 용어를 따라 말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심지어 시험도 통과합니다. 실제로는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입니다. 표면적 이해와 진짜 이해 사이에 간극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재인(recognition)과 인출(retrieval)은 다릅니다. 들으면 "아, 그거"하고 알아보는 것과 백지 상태에서 스스로 꺼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인지 작업입니다. 단어를 들으면 "아, 들어본 것 같아"라고 느끼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막힙니다. 뭐가 뭔지 재인은 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인출이 안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처리 유창성(processing fluency)의 함정이 있습니다. 듣기 쉽다고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닙니다. 영상이 깔끔하게 편집되어 있고, 설명자의 말투가 자신감 있으면 우리는 내용도 쉽다고 착각합니다. 정보가 부드럽게 흘러 들어오면 이해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해한 느낌과 실제 이해 수준은 다릅니다. 이 간극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mimicry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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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mimicry는 어떻게 진짜 이해가 될까요.

Meyer와 Land는 리미널 상태를 통과할 때 'integration'이 일어난다고 봤습니다. 분리되어 있던 조각들이 연결되면서 하나의 그림이 되는 순간입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감각입니다. 이전에 따로 놀던 개념들이 갑자기 맞물립니다.

통합이 일어나려면 기존 틀이 재구조화되어야 합니다. 새 정보를 기존 틀에 끼워 넣는 게 아니라, 틀 자체를 바꾸는 겁니다. 이건 인지적으로 비용이 큽니다. 그래서 mimicry가 더 쉽습니다. 틀을 안 바꾸고 표면만 맞추면 되니까요.

AI 시대에 이 리미널 상태가 더 자주 올 것 같습니다. 새로운 개념이 빠르게 쏟아지고, 기존에 알던 것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순간이 늘어납니다. 프롬프트, 에이전트, RAG. 단어는 들어봤는데 전체 그림이 안 잡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영상이나 글로 접하면 알 것 같은데, 막상 자기 상황에 적용하려면 막힙니다.

문제는 mimicry가 본인에게도 잘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처리 유창성이 높은 콘텐츠를 소비하면 이해했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간극이 드러나는 건 직접 써보거나, 남에게 설명하거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마주했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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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기 전 평평한 구간.

밖에서 보면 정체지만,

안에서는 진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진동을 견디는 힘,

그리고 이해한 느낌과

실제 이해 사이의 간극을

직면하는 용기가

결국 학습 속도를 가르는 건 아닐까요.



참고문헌
� Turner, V. (1967). The Forest of Symbols: Aspects of Ndembu Ritual. Cornell University Press.
� Meyer, J. H., & Land, R. (2005). Threshold concepts and troublesome knowledge (2): Epistemological considerations and a conceptual framework for teaching and learning. Higher Education, 49(3), 373-388.
� Nestojko, J. F., Bui, D. C., Kornell, N., & Bjork, E. L. (2014). Expecting to teach enhances learning and organization of knowledge in free recall of text passages. Memory & Cognition, 42(7), 1038-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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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정 인지심리학 박사님

SK Research Fe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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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