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놀이
어릴 때 엄마 아빠 놀이 해보셨나요?
나는 엄마, 너는 아빠, 쟤는 아이,
각자의 역할을 정합니다.
엄마는 아침밥을 준비하고
아빠는 출근 준비를 합니다.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엄마는 저녁밥을 하고
아빠는 TV를 봅니다.
식사 준비가 다 된 엄마는 아빠와 아이를 불러
저녁을 먹습니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면
우리는 암묵적인 역할놀이를 시작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딸, 동생이나 언니, 형 또는 친구와
같은 역할에서 누군가의 여자친구, 남자친구,
아내, 남편이란 역할이 하나 더 생기는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었던 남자나
여자에 대한 생각들,남녀관계에 대한 생각들이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도를 했든 아니든
아내나 남편의 역할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며 살아왔습니다.
가까이서는 부모님을 보며 판단을 해왔을 것이고,
TV나 인터넷, 들려오는 남들의 사연들을 통해서
뭐가 좋아 보이고 나빠 보이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경험을 통해서 내가 어떤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방식이 나한테 맞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첫 연애를 하면서
남친에게 쿠키를 구워준 적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아마도 만화책에서 몇 번 본 것 같은데,
연애를 하면 쿠키를 직접 구워 예쁘게 포장해서
남친에게 주는 것이 사랑스러운 그리고 사랑받는
여친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때까지 쿠키는 한 번도 구워본 적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저에게는 동업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좋아하는 남자에게
쿠키를 구워주고 싶어 하는 친구였습니다.
우리 둘은 친구네 집에서 만나
쿠키를 굽기 시작했습니다.
밀가루로 사방을 엉망으로 만들며 열심히 한 결과
모양이 그럴듯한 몇 개의 쿠키를 서로 나눠 갖고
각자 준비한 상자에 담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즐거운 추억이지만,
그 당시에는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든 쿠키를 남친에게 줄 때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남친은 제가 보기와 달리 여성스럽다며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뿌듯하였으나
다신 쿠키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또 쿠키를 구워 달리는 남친의 이야기에
"응, 다음에"라고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 대학 때 만난 남친에게
또 한 번 쿠키를 줄 계획을 세웁니다.
고등학교 때 남친의 반응의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만들지 않았습니다.
백화점에서 가장 엉성해 보이는 수제 쿠키를 사서
준비한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들었다고 하고 선물했습니다.
그 남친은 고등학교 때 남친보다 더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자랑을 했습니다.
속였다는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지금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요리에 소질이나 취미가 없어
그 과정이 즐겁지도 않고
남친이 쿠키를 구워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나의 매력을 애써 어필하지 않아도
충분히 남친이 나를 좋아하고 있는데도
난 뭘 위해 이러는 걸까 의문이었습니다.
결론은 그 당시 전 그게 여친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한테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공감을 잘하며 배려를 하려고 하는 장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연애를 하면서 또는 결혼을 하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 생각하고 계시나요?
또는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난 원하지 않았고
상대방도 대놓고 요구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해야 한다'라고 여기며
달갑지 않게 하고 있는
역할 행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역할이 아니지만 상대를 위해
기꺼이 하고 싶은 행동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남자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서 티를 내면 안 되는 것이고
작은 일에 실망하거나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집안을 잘 정리해야 하며
모성애가 넘쳐야 합니다.
그 대상이 내 아이가 아니라 남편일지라도요.
이런 역할놀이들이 관계를 안정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에 스트레스를 받고 지친다면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기대하고 있는 역할 모습은 무엇인지,
그것이 나의 심리적 건강함보다 중요한 것인지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 파트너와 함께 얘기해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얘기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적어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나의 노력과 헌신에
대해 파트너가 알게 되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입니다.
당신은 어떤 역할놀이를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