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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인의 관계심리학] 나는 수집광인가!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물건들을 버릴 수가 없어요"

by 심리학관

제가 얼마전에 이사를 했는데요,

구석구석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물건들이 엄청 나오더라구요ㅎㅎ


대체 난 뭘 이고지고 살았던건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멍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안 쓰고 안 입는 것들을

좀 버려야겠다 다짐하고

찬찬히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무언가를 고르고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골라서 버리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물건들과 연관된 추억들도 떠오르고

20년 전에 샀던 옷을 보며

시간의 흐름도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낡고 바래서 앞으로 절대 입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망가져서 쓰지 못할 것이 분명한 것들을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이요.


나는 대체 이것들을 왜 갖고 있었을까,

이 전에도 몇 번은 버리려고 시도했었는데

왜 그 때 버리지 못했을까,

이 물건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00리터 쓰레기 봉투 5개를 채우며

저는 이 물건들과 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 물건들과 진작에 분리되지 못했는가!


유난히 많았던 낡은 옷과

유통기간이 지난 색조화장품을 보며

나는 수집가인가,

아니면 그냥 버리지 못하는 사람일까

라는 생각에 갑자기 생각난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수집광(Hoarding Disorder)' 입니다.


수집광(Hoarding Disorder)

출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


진단기준

A. 실제 가치와는 상관 없이 소지품을 버리거나 소지품과 분리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어려워한다.

B. 이런 어려움은 소지품을 보관해야만 하는 인지적 필요나 이를 버리는 데 따르는 고통에 의해 생긴다.

C. 소지품을 버리기 어려워해서 결국 물품들이 모여 쌓이게 되고, 이는 소지품의 원래 용도를 심각하게 저해하여 생활을 어지럽히게 된다. 생활이 어지럽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족 구성원이나 청소부, 다른 권위자 등 제3의 개입이 있을 경우뿐이다.

D. 수집광 증상은 (자신과 타인을 위한 안전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포함하여)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가능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한다.

E. 수집광 증상은 뇌손상이나 뇌혈관 질환, 프래더-윌리 증후군과 같은 다른 의학적 상태로 인한 것이 아니다.

F. 수집광 증상은 다른 정신질환으로 더 잘 설명되지 않는다(예, 강박장애의 강박 사고, 주요우울장애의 감소된 에너지, 조현병이나 다른 정신병적 장애에서의 망상, 주요신경인지장애서의 인지 능력 결함, 자폐스펙트럼장애에서의 제한된 흥미).


이렇게 소지품을 처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물건에 대한 강한 감정적 애착이 있거나

미적 가치를 인정해서,

또는 그 물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나는 왜 버리지 못했을까?'


생각해 본 결과

강한 감정적인 애착 때문이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물건들을 버린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지고 쓸쓸해지면서

슬픈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요한 누군가와 이별하는 것처럼요.


수집광의 사람들에게

애착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애착 문제는 꼭 '사람 대 사람'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대 물건'에서도 드러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저는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과도하게 물건을 구매하는

'과도한 습득'의 행위도 있었습니다.


버리기만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기도 잘 사는 것이지요.


한창 곤도마리에의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할 때

도저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아, 나는 맥시멀리스트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수집가.jpg 맥시멀리스트인가, 수집광인가 (갖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만을 찍은 사진입니다) - 사진:심도인


이번에 이사를 하며

맥시멀리스트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단 것을

깨달았습니다.


몇 번을 살펴봐도 색이 바래서 입지도 않을 옷을,

유통기간이 많이 지나 스치기만 해도

얼굴에 뭐가 날 것 같아 바르기도 찝찝한 화장품을

쓰레기 봉투에 넣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들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분리와 이별이 어려운 사람은

물건도 못 버리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물건들을

쓰레기 봉투에 넣었습니다.


조명 아래 색을 비춰보기도 하고,

화장품을 손등에 발라보기도 하며,

또 쓰레기 봉투에 넣었던 것을

다시 뺐다가 또 다시 넣다가 하며ㅎㅎㅎ


쓰레기 수거함에 내어 놓았던 쓰레기 봉투들이

다음 날 싹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

제 마음도 싹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동안 마음 속에서 놓지 못하고 있던

여러 인연과 집착들도 함께 쓰레기 봉투에

넣은 기분도 듭니다.


아직도 많은 물건들이 거실에 널부러져 있고

버릴 것도 가득하지만

최대 수십년 동안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을

버리는 새로운 시도를 하며

이사한 집에서는 그 전과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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