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릴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준 신발

뉴발란스 모어 V4, 속도 대신 지속을 선택하다

by 조아

<신발이 전하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처음 세운 계획은 단순했다. 러닝화 리뷰를 쓰는 것이었다. 영상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감각, 광고 문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나만의 언어로 기록하고 싶었다. 사실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신발을 좋아했다. 좋아함은 곧 수집으로 이어졌고, 수집은 어느 순간 욕망이 되었다.


아내는 가끔 내 방을 보고 말한다.


“지네발 러너.”


반박하지 못한다. 발은 두 개인데 러닝화는 이미 30켤레를 넘겼으니, 지네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러닝화는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LSD, 회복런, 템포런, 인터벌. 훈련이 다르면 신발도 달라야 한다. 문제는 ‘필요’와 ‘욕망’의 경계다. 나는 쿠셔닝을 선호한다. 그래서 맥스 쿠셔닝 모델이 유난히 많다. 중복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충동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특히 LSD와 회복런용 쿠셔닝 러닝화는 이미 포화 상태다. 80% 할인이라는 숫자가 눈을 흔들어도, 손은 잡히지 않도록 멈춘다.


리뷰의 기준도 정했다. 최소 100km 이상을 신고 달린 신발만 다룬다. 단순 착화감이 아니라, 시간과 거리로 검증된 감각만 기록하기 위해서다. 러닝화 마일리지를 관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수명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을 점검하는 기준이다.


첫 리뷰 모델을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뉴발란스 모어 V4>


https://brunch.co.kr/@ilikebook/1099


이미 은퇴한 신발이다. 훈련용으로는 더 이상 신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신발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과체중 러너였던 나에게 모어 V4는 방패였다. 프레시 폼의 부드러운 쿠셔닝은 무릎과 발목으로 전해지는 충격을 줄여주었다. 발볼이 넓어 안정감도 충분했다.


연 2,000km를 넘게 달리던 시절, 이 신발은 가장 자주 선택된 러닝화였다. 어쩌면 기대 수명보다 빨리 은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많이 신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모어 V4는 스피드용이 아니다. 이 신발은 “얼마나 빠르게”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에 집중한다. 높은 미드솔과 무게감은 빠른 페이스에서는 부담이 된다. 또한 카본화에서 느껴지는 반발력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LSD나 회복런에서는 그 진가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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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 V4는 속도를 올려주지 않는다. 대신 달릴 수 있는 시간을 늘려준다. 그래서 나는 결국 모어 V5도 구매했다. 아직 꺼내 신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다. 마일리지가 더 쌓일 그날을. 앞으로 새로운 버전의 모델이 출시된다 하더라도 모어라는 신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는 시간을 지켜주는 역할.


은퇴한 모어 V4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미드솔은 닳고 닳았지만, 다른 부분은 멀쩡하다. 신발장 안에 조용히 놓여 있다. 아직 밝힐 수는 없지만 새로운 변신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 나를 대신해 닳아준 신발에게 늦은 인사를 건넨다.


고맙다.

내가 계속 달릴 수 있게 해 줘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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