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치아 May 10. 2021

모든 칭찬에는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내 딸과 아들은 'NO'를 말할 수 있는 싸가지이길.

커버 출처 - 네이버 웹툰 <Dr.&Dr.육아일기>


어른들은 말이 없이 혼자 노는 아이들을 보면

"예의 바르다"라고 칭찬한다.


부모님이 아무리 무리한 요구를 해도 웃으며 '네'라고 따르는 아이들에겐

"착하다"라고 칭찬한다.


반면 부모님께 "싫어요"라는 대답을 하거나,

어른들끼리 대화 중에 끼어들어 질문을 한다면

"싸가지가 없다."는 뒷담화가 오갈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래 질문해야 정상이고,

어른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 하고,

어른들에게 질문을 한다는 건 그만큼 자존감이 높단 증거이고,

어린이들 또한 싫은 건 싫은 것이 당연하고, 거절할 권리가 있는 법이다.


내가 어렸을 땐

부모님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었으니 은혜를 갚아야 한다,

고로 부모님 말씀에 모두 따라야 한다,

라는 일그러진 '효'사상이 학교에서나 가정, 사회 전반에 걸쳐 교육되었다.


그렇게 교육받다 보면 부모님께 거절하지 못한 습관이 몸에 배어

사회에 나가 타인에게거절하기 힘들어한다.


내 돈 내고 산 물건에 하자가 있어도

내가 노력한 일에 부당한 평가를 받아도

그 자리에서 바로 불만을 표하거나, 항의하질 못하고,

생전 처음 보는 이해관계만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난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고 싶어 했다.

 



난 첫 연애를 꽤 늦게 시작했다.

'그'를 25살에 만나 멀리서 바라만보다 26살에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물론 그는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그당시 내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더 좋아했다.

그의 말은 모두 시로 들렸고,

그가 좋아하는 영화 '무간도' 시리즈를 몇 번이나 봤고,

그에게 옷 한 벌 선물 받으면 나는 그보다 비싼 벨트를 사주지 못해 안달을 냈다.

그는 그런 나를 늘 "착하다"고 칭찬해주었다.


1년 정도 만났을 때,

그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거의 한 달간 나만 몰랐다.

우리 부서 외에 나와 얼굴만 아는 다른 층 직원들도 그가 신입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걸 알았는데

오로지 나만 43일 간을 전혀 몰랐다.

그는 나와 정리한 상태라 했지만,

난 그 기간에도 500일 기념일 날 어디 놀러 갈지 검색을 하고 있었다.


잘못한 건 그인데,

난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들처럼 그의 뺨을 때릴 엄두조차 내질 못하고,

심드렁해하는 그에게 '나쁜 놈'이란 욕조차 한마디 못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신입보다 너무 촌스러워 그런지, 내 문제점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내가 원치 않는 이별을 겪고 나서

모두들 내게 그를 욕하고 미워하는 말을 하는데

내게는 아직도 그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었기에 하루아침에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할 수 없는 나를 미워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의 가사도 있지 않은가.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난 그 어처구니없는 배신을 당한 상황에서도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보단

그가 싫어하는 일을 안 해야 하지 않은가.




이번 주 아이들 담임선생님들과 상담주간이라 전화통화를 했는데

"착하다"란 평가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두에게 착할 필욘 없다고.

너희들이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NO"라고 말하는 건 어른들도 참 힘들어하는 말이니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엄만 너희들이 좀 더 용감해졌으면 좋겠다고.

혹시 용기가 나질 않아도 괜찮다고. 다들 겁을 낸다고.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의 그 모습 그대로도 좋다고.


작가의 이전글 INFJ 엄마가 INFP 아들을 키우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