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지키는 자유로서의 행복"
누구라도 죽음 앞에 행복하기를 원하고 살아있는 동안 늘 행복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나 역시 행복한 삶을 원하지만 그 ‘나의 행복’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누가 묻는다면 명쾌하게 답변할 자신이 없었다.
『질문의 격』(유선경, 2025)을 읽으며 나는 용기를 가지고 마치 철학자가 된 것처럼 생각해 본다. 행복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여러 가치들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하나의 구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어술러 르 귄(Ursula K. Le Guin)처럼 행복에 대한 나의 전제를 해부해 보기로 했다.
첫째, 행복은 단순한 결과 상태가 아니다. 과정 속에서도 발생한다. 우리는 때로 과정이 즐거우면 결과와 무관하게 행복하다고 믿고, 반대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고 나면 결과가 좋다는 이유로 그 전체를 행복이라 부른다. 행복은 인식의 방식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지도 모른다.
둘째, 행복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자유, 정직, 안정, 지위, 인정 등과 같은 다른 가치일 수도 있다.
셋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없을지라도, 그 방법을 찾으려는 태도 자체는 중요하다. 나는 포기하기보다 탐색하는 삶을 택하고 싶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나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었다.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삶 전체 속에서 일관되게 구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곧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일까? 평소 내가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일 것이라 생각하고 정직, 안정, 의미, 관계, 영향력, 창조, 자유 등 여러 가지 개념어를 생각해 보지만, 내가 생각한 가치들은 모두 ‘자유’라는 말에 종속되어 있거나 자유가 없으면 의미 없는 가치들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자유는 ‘잃어도 후회하지 않을’ 그 무엇일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방해받지 않는 상태로서의 자유”, 곧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를 중시해 왔다. 이것은 아마 내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의 <자유론>(1859)을 읽고 생겨난 것이거나, 내 생각과 밀의 생각이 일치해서 박수를 친 이후에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자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여러 공동체의 한 구성원인 내가 정말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간섭이나 방해는 내가 감당해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면 - 그 간섭이나 방해가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 부당한 간섭이 없는 방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양심에서 어긋나지 않음’은 무엇인가? 나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는 아니지만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처럼 양심에 반하는 명령은 따를 수 없다.
‘여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전적으로 순수한 나의 욕망인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인가?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 1632–1677)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지만, 그 욕망의 원인을 모른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만약 내 욕망의 원인이 외부에서 왔다면 그 욕망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나의 자유일까?
그 자유라는 가치가 다른 가치(안정, 관계, 책임 등)와 충돌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시적 충돌이 궁극적으로 나의 자유를 확장한다면 당연히 조정할 것이다.
이렇게 다소 '시시콜콜한' 물음과 생각을 통과하며 나는 결론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 자유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인가, 궁극적으로 다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가? 나는 그러한 자유가 전제되어야 만이 ‘나’라는 실존적 삶인 후회 없이 성찰적으로 발전하는 삶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인간 존엄(dignity)이 지켜지지 않는 자유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존엄은 나의 자유라는 가치를 지켜주는 나의 최상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후회 없이’란 무엇인가? 미래의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다른 반성이 없는 한, 다시 선택해도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선택의 결과는 통제할 수 없지만, 선택의 기준은 내가 통제한 것이므로 온전히 나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현하고 있다’의 ‘있다’는 사실인가, 사실로 느끼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정말 사실을 사실이라고 인식한 것이 정확한가? 경험을 기억하는 규칙 중에 행동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주장하는 ‘피크-엔드 규칙(Peak-End Rule)’에 따르면, 인간은 얼마나 오랫동안 행복했느냐가 아니라 '경험 기간을 무시(Duration Neglect)'하고 가장 강렬했던 순간(피크)과 마지막 순간(엔드)의 평균을 기준으로 판단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행복은 사실이라기보다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해석이 삶을 구성한다면, 그것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복잡한 생각 끝에 ‘행복’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게 1차 정리되었다.
"행복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존엄을 잃지 않는 자유를 보존하며,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향을 책임지고 깊게 살아가는 것이다."
답변을 다시 분해해 본다. 이런 철학적 놀이가 점점 흥미로워진다.
나의 최상의 가치는 존엄이다.
이 존엄의 조건은 존엄을 잃지 않는 자유이다.
자유의 조건은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자기 선택이다.
행복은 상기의 것들이 지속적으로 실현되는 상태이다.
존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다소 추상적이므로 ‘자기 결정권이 박탈되지 않는, 양심을 배반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침해하지 않는’으로 변경한다.
자유를 ‘보존하고’라는 표현에는 외부의 강제도 포함될 수 있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로 변경한다.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의 표현은 이미 존엄의 속성에 포함될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책임지고’라는 표현은 버린다는 것인가, 품는다는 것인가? 나의 책임의 의미는 그 결과를 삶의 일부로 통합한다는 의미이므로 ‘통합하며’로 변경한다.
‘깊게 살아간다’는 표현은 다소 미학적이긴 하나 모호할 수 있어 ‘지속적으로 자기 성찰하는 삶’의 의미가 들어가는 표현으로 변경한다.
이 모든 사유를 거쳐 나는 나의 행복을 이렇게 정의해 본다.
"나에게 있어 행복은 존엄을 침해하지 않는 가치인 자유 속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삶에 통합하며 성찰적으로 발전하는 삶이다."
이 정의는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감정은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최종 기준은 가치에 있어야 한다. 행복은 기쁨의 총합이 아니라, 나를 배반하지 않는 선택의 축적이다.
행복은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구현에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2026. 3. 4, 중국 上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