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기 계발 : <질문의 격>

의문이 아닌 질문을 하라!

by durante

[들어가며]

이젠 답이 아닌 질문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얼마 전 <타이탄의 도구들>을 읽었을 때 의문과 질문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을 보고 느낀 점이 있다. 의문은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면서 "의문은 '삶의 수준'을 결정하고, 질문은 '삶 자체'를 바꾼다."라고 한다.([독서] 자기계발 : 타이탄의 도구들)

타이탄이 되려는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잘 질문하는 방법을 정리하고 싶어 유사한 책을 하나 들었다.

유선경 작가의 <질문의 격>(2025).


서문에서 작가가 던진 들어가는 질문. "그때도 몰랐는데 지금도 모른다!" 지금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이제와 새삼 모른 것일 리가 없는데, 이전부터 질문을 잘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따끔한 충고. - 요즘 다양한 AI Tool을 통해 궁금한 것을 많이 해결하고 있기는 하지만 AI에게도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따라 답변이 상당히 달라짐을 경험하고 있다. -


"세상에 답은 없다."라는 다소 염세주의적 말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정답은 없을 수 있지만 수많은 답은 있을 것이다." 하는 신념으로 이 책을 교과서 삼아 "질문의 품격"을 올려 보려 한다. 그렇다면 왜 질문하는 방식이 중요한지부터 고민해 본다.



[옳은 질문 방식이란?]


타이탄들은 자신에게 회의적인 의문을 가지지 말고 올바른 우선순위를 갖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넬슨 만델라의 사례를 먼저 보자.

- 의문 :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습니까?(아마 몹시 견디기 힘들어 죽고 싶을 심정이었을 것이다)

- 질문 : 감옥에서 그 긴 세월을 이기기 위해 무슨 준비를 하셨습니까?


질문은 그 안에 '왜' 또는 '?'가 있다고 모두 질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이를 나는 '닫힌 질문'이라 부른다.) 질문 안에 '목적'과 '방향'이 있어야 한다.('닫힌'에 대응해서 '열린 질문'이라 하자)

- 닫힌 질문 : "왜 이것도 못해?"

- 열린 질문 :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대개 닫힌 질문은 불평, 불만, 비난의 의미가 담긴다. 그러니 상대방이 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미국 SF 소설의 거장인 어술러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의 "잘못된 질문에는 답이 없다(There are no right answers to wrong questions.)"라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어둠의 왼손, The Left Hand of Darkness>) - 그녀의 의도는 "우리가 세계를 오해하는 이유는 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질문의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


그럼 질문의 구조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해 철학적으로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부터 고민해 보자.

질문은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고, 누군가 알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일어난다. 만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욕망이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론자라면 질문 자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질문은 곧 “인간은 어떻게 세계와 관계 맺는가”라는 인식론적 철학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질문은 지식 전달의 수단일까?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약 470~399)는 질문을 지식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영혼을 각성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그의 산파술은 답을 주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도록 만드는 각성 과정이었다. 그런데 동물의 등짝에 붙은 멍에처럼 살아온 소크라테스는 이집트 왕 타무스의 말(문자는 상기의 영약)을 빌려 문자 사용을 반대했다고 한다.(플라톤, <파이드로스>)


플라톤(Plato, 기원전 428/427~기원전 348/347)은 그의 이데아(Idea)로 대표되듯이 현상을 넘어서 본질을 묻기 시작한다. 즉,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기원전 322)는 사물을 이해하려면 4원인, 즉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질료인), 무엇인가(형상인), 누가 만들었는가(작용인), 왜 존재하는가(목적인)를 묻는다. 여기서 질문의 핵심은 ‘왜’이다. 단순한 사실 확인은 지식이 될 수 있으나, 원인을 묻는 질문만이 이해에 도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옳은 질문은 원인을 추적하는 질문이다.


근대 이후 질문은 존재의 문제로 확장된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키르케고르에게 옳은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기 삶을 걸고 던지는 실존적 질문이다. 질문은 선택을 요구하며, 선택은 곧 자기 자신을 형성한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질문을 해체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는 “이 도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라고 묻는다. 이는 표면적 가치 뒤에 숨은 힘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이다. 니체에게 나쁜 질문은 전제를 의심하지 않는 질문이다. 좋은 질문은 전통과 관습을 망치로 두드려 보는 질문이다.


20세기에 이르러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이 존재를 묻는 법을 잊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 많이 묻지만,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질문은 존재를 열어젖히는 행위다. 질문은 정보를 얻는 기술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 통로다.


앞서 언급한 어술러 르 귄(Ursula K. Le Guin)은 <어둠의 왼손>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이미 세계관을 전제하는 사고 구조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질문은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누가 옳은가?라는 질문은 힘의 논리가 전제되어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목적을 전제로 한다. 질문이 틀리면 답은 무의미하다. 옳은 질문은 세계의 복합성을 존중하는 질문이다.


질문이나 문장을 구성하는 어휘에 있어 적확한 어휘사용에 대해 고민해 본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의하면 아돌프 아이히만이 43만 7천 명을 살해한 이유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언급한다. 아렌트는 악이 ‘악한 마음’이 아니라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어떤 인간도 죽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학살'이란 어휘 대신 '최종 해결책'이란 어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치는 무사유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불명확한 어휘를 사용하고자 하는 '오사유'를 한 것이고 그 어휘를 받아 실천한 아이히만은 '무사유'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유하며 질문하라!


현실적인 사유(사고력)가 필요한 질문의 예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서운하게 할 때 나는 자주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라는 질문 또는 독백을 하며 내 감정을 해친다. 이를 사고가 필요한 질문으로 바꾸면 "내가 너에게 ㅇㅇ을 기대했는데 알고 있어?"라는 질문이 된다.


상하관계가 있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선배/상사에게 모든 것을 알려달라는 '귀여운' 후배/직원이 간혹 있다. 이럴 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스스로 충분히 알아보고 고민한 다음에 예의를 갖춰 선배/상사에게 물어보라'라고 한다. 유 작가의 생각/방식이 나와 100% 일치하는 놀라운 순간이다.



[옳은 질문 방식]


어린이의 호기심으로.

나의 다른 글에서 준비된 자는 자만심이 아닌 자신감을 가진다고 언급한 바 있다.([독서] 자기계발 : <자신감>) "꽃은 왜 필까?"라는 어린이의 순수한 질문을, 어른은 받아서 "식물은 어떻게 꽃을 피울까?"로 질문을 확장한다. 그런데 이 어른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 중에 부끄럽지만 나는 책을 보고 잊었던 것을 다시 알게 된 부분이 있다. 식물도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 겨울 내내 미리 '준비'하고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특히 바람에게 꽃가루를 부탁하는 어떤 나무는 꽃이 먼저 핀 다음 잎이 나중에 피는데, 그 이유는 잎을 달고 있으면 바람이 꽃가루를 옮겨가는 길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종류의 꽃을 풍매화(風媒花, anemophily)라고 하는데 참나무(Quercus), 자작나무(Betula), 오리나무(Alnus), 개암나무(Corylus)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풍매화는 곤충을 유인할 필요가 없으니 화려한 꽃이 있을 리 없다(아니면, 화려한 꽃이 없어 곤충이 안 오니 꽃을 먼저 피워 바람에 날리는 전략을 쓴 것일까?).

나무조차도 미리 준비하고, 전략을 수립한다. 자연이 인간보다 더 전략적이다!

풍매화와 충매화(蟲媒花, entomophily or insect pollination).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의 책처럼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유 작가는 문학적 감수성과 철학적 사고를 통해 위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을 한다.

"때와 준비가 필요한 것은 꿈과 소망이 있어서 이니, 꽃이 어떻게 피느냐 하면 꽃을 피우고 싶은 꿈과 소망으로 피는 것이다."

자작나무.jpeg <풍매화 중 자작나무>


의문사를 사용하는 질문

타이탄들과는 다르게 일단 저자는 의문부터 시작한다. 의문은 '답'을 목적으로 하고 질문은 '앎'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의 의문사 '왜'와 '무엇'의 차이가 이렇게 달랐나? "왜 그랬어?"와 "무엇이 필요해서 그랬어?"라는 의문의 차이 말이다. 무엇은 감정의 기어를 중립에 두는 기능을 한다.


맥락

전체적인 맥락(context)을 파악해야 올바른 질문이 가능하다. 예시로 든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을 40여 년 만에 다시 읽는다. 저자의 구수한 어휘력과 해학적인 이야기 전개가 지금 읽어도 매우 흡족하다. 그런데 이 동백꽃이 내가 알고 있는 부산 동백섬의 그 붉은 동백꽃이 아니고 생강나무 꽃임을 또 이번에야 알았다. 생강나무의 그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움새'를 맡고 싶어진다.


핵심 어휘

어떤 정보(글, 출판물, 말을 포함한)에서 문해력(Literacy)을 갖추었다는 것은 핵심 어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질문의 의도와 목적

나는 지난해부터 이 Brunch를 통해 일종의 '독서 일기'를 쓰고 있다. 읽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느라 시간이 많이 필요할 듯했고, 그로 인해 독서량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다소 생뚱맞은 걱정도 했지만, 이젠 오히려 이것이 이제 습관화가 되었는지 그전보다 독서량이 더 늘어나고 기억도 좀 연장되는 것 같아 매우 만족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 어휘력이 늘어나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무엇이라 답을 할 것인가?

답을 하기 전에 저자는 이런 '예/아니오'를 요구하는 질문보다 더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원한다면 질문의 의도와 목적을 짚어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독서와 어휘력은 어떤 연관이 있나요? 많이 읽을수록 어휘력이 확실하게 늘어나나요?"

나의 답도 저자와 동일하다. 이렇게 Bruch로 감상평을 쓰고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독서는 나의 사고력을 정리해 주고 어휘력도 개선된다고 확신한다.


질문의 범주를 좁히고 구체적으로

늘 나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중에 폭넓은 범주의 질문이 있다.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이번 장에서 이 질문을 변경해서 적절한 답을 찾기를 기대하면서 읽어간다.

저자는 상기 6가지 옳은 질문 방법을 기준으로 질문을 수정하라고 한다. 독자에게 쉽지 않은 요청이다!

먼저 어술러 르 귄(Ursula K. Le Guin) 방식으로 질문의 구조(틀)를 해체해 보자. 이 질문에는 최소 3가지의 전제가 있다.

1. 행복은 하나의 상태다

2. 행복한 삶에는 정답이 있다

3. 방법(How)을 알면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르 귄 방식으로 보면 이 전제가 정말 확실히 맞는지를 의심한다.

1. 행복은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2. 행복에 보편적인 모델이 있는가? 각 개인마다 다른 것 아닌가?

3. 행복은 사는 방법이 아니라 행복의 가치를 무엇에 두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그렇다면 르 귄은 이렇게 새로운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삶을 행복이란 목표를 향한 경로로 이해하는가?"

여기서 멈춘다면 이것은 성숙된 사상가의 명쾌한 질문이 될 수 없다. 공허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상대로 질문을 재정리하여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떤지 우리는 참고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르 귄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행복은 결과나 상태가 아니라 순환적 흐름이다. 행복은 보편적이지 않고 관계의 균형 속에서 발생한다. 행복은 사는 방법이 아니라 행복의 가치를 무엇에 두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내 질문은 "나는 어떤 삶을 살 때, 나와 세계의 관계가 역동적인(dynamic) 조화를 이루는가?"이다"

르 귄 방식의 질문을 추정해 보았지만, 원래의 내 궁금증인 "행복"에 대해서 묻지를 못한 것 같다. 다른 철학자들은 어떻게 질문하고 어떤 철학적 견해를 제시했을까?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복(eudaimonia)은 쾌락이 아니라 탁월성에 따른 활동이므로 "나는 나의 고유 기능(ergon)을 충분히 발휘하며 덕(aretē)에 따라 이성적으로 활동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로 질문할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보편적 행복을 묻지 않으므로 "나는 진정한 선택을 하며 나 자신이 되기를 절망적으로 원하며 살고 있는가?"로 질문할 것이다.

니체는 행복을 목표로 삼는 태도 자체를 의심해서 '행복해지는 법'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는 힘이 있는가에 관심이 있을 것이므로 "나는 나의 고통을 힘으로 바꾸어 긍정하며 나 자신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가?"로 질문할 것이다.

하이데거에게는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므로 "나는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죽음을 자각하며, 나의 본래적 존재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로 질문할 것이다.



[삶과 세상을 바꾸는 질문]


답보다 '어떻게'

저자의 요청과 무관하게 <나의 행복론에 대한 질문과 답>은 무엇인지 연습해 본다. 내가 마치 철학자라도 된 것 마냥 나의 질문과 답변은 무엇일지 고민하며 별도의 글로 남긴다.([내생각] 행복에 대하여)


상황이 바뀌면 답도 바뀐다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작품 중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은 흔히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과정에서 내면의 불안을 표현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저자는 다른 주장을 하는데 다소 설득력이 있다. 윌리엄 파슨스((William Parsons, 1800~1867)의 드로잉을 참고했고 소용돌이치는 은하 M51에 대해 인지했으며 월트 휘트먼(Walter Whitman, 1819~1892)의 시 <나 자신의 노래>에 깊이 공명하고 영감을 받았다는 해석을 한다. 관련 기사도 있어 참고하기로 한다.([사이언스] 천문학자들이 해석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 비즈한국) 이 기사에 의하면 '2004년 천문학자들은 (...) 고흐가 그린 소용돌이는 목성 대기의 난류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패턴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고흐 별이 빛나는 밤.jpg 별이 빛나는 밤De sterrennacht (The Starry Night)(1889)


윌리엄 파슨스 드로잉.jpeg 윌리엄 파슨스 드로잉(1835)


은하 M51.jpeg 소용돌이 은하 M51(출처 : starry night 7)


(...) 초승달 어린이가 제 뱃속에 자기 보름달 어미를 데리고 간다. (...)
-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중 14 -


같은 것을 보면서도 관점의 확대를 경험한 이들은 다른 틀을 가지고 다른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다(183p)

뉴턴이 자신의 '만유인력의 이론'에 대해 '데카르트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것'이란 겸손한 표현을 한 것처럼 우리는 늘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낼 수 없고 과거 '거인의 어깨'의 도움을 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도움을 받아 모방이 아닌 창의적 생각과 질문을 하는 것이 거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왜'가 아닌 '어떻게 하면'으로 질문하기

저자는 도요타의 오노 다이이치가 주장한 그 유명한 '5 Why' 질문은 근본적 원인 파악에는 꼭 필요하지만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으로 질문하기를 권한다.


위대한 질문들

여러 질문의 예시 중에 증기기관 발명과 관련된 프랑스의 '드니 파팽(Denis Papin, 1647~1712)'과 영국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요약하면 증기기관은 드니 파팽이 1679년 최초의 피스톤 증기엔진을 만들었으나 영국의 제임스 와트를 통해 실용적 증기기관으로 발전했는데 그 이유는 1) 파팽은 이 엔진을 동력으로 외륜선을 제작해 엘베강에 띄웠으나 밥줄이 끊어질 것을 우려한 뱃사공들이 외륜선을 불태웠기 때문이고, 2) 나무가 부족해 석탄을 사용해야 하고 탄을 캐려니 탄광에 고이는 물을 빼낼 증기기관이 필요했던 영국과 달리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프랑스는 파팽의 증기기관 이론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직 이기주의와 풍요가 주는 태만의 결과라 할 수 있다.([오늘의 경제소시/8월22일] <1481> 드니 파팽)


주어진 예시 중에 하나를 고른다.

의문 : "지금 당신의 삶이 노예의 삶보다 나을까?"

질문 : "어떻게 하면 지금 당신의 삶이 노예의 삶보다 나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배경에는 평소 나도 늘 가지고 다니는 궁금증. "옛날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는데 왜 먹고사는 일은 계속 고단할까?"에서 출발한다. 산업혁명 시기의 런던 시민의 평균 수명은 27세, 노동자 계층은 22세였고, 지금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83.7세로 크게 연장되었는데 말이다.

저자는 타 교수의 입을 빌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라 권한다.


이전 내 Bruch인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 "1648년부터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회화의 등급을 정했다는 것에 화가 난다. 역사화(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등), 초상화(특히 왕, 왕비), 풍경화, 풍속화의 순이라는 것이다."([독서] 철학)라고 정리한 적이 있는데 <질문의 격>의 유작가는 "어떻게 하면 흔한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고 나는 나의 brunch를 다시 일독한다.


저자의 말대로 "왜 그럴까?" 또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로 머물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로 물어보자.


[나가며]

저자는 옳은 질문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6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1) 어린이의 호기심으로 2) 의문사 사용 3) 맥락 4) 핵심 어휘 5) 질문의 의도와 목적 6) 질문의 범주를 좁히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삶과 세상을 바꾸는 질문으로 '어떻게 하면'이란 다소 실행하기 쉬워 보이는 방법을 제시해 줘서 감사한다.


그렇다면 내 방식대로 어떤 질문이 더 바람직한 질문인가 재정리해 보자.

첫째, 전제를 점검해 보자.

둘째,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물어보자.

셋째,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살아있는 질문을 해보자.

넷째, 답을 닫기보다 사유를 확장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마지막으로, 다소 철학적이긴 하나 존재를 변화시키는 질문인가 생각해 보자.


질문의 격은 지식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태도로 결정된다. 낮은 격의 질문(의문)은 외부를 비판하지만, 높은 격의 질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다. “왜 저 사람은 저럴까?”라는 낮은 질문(닫힌 질문)을 하지 말고 “나는 왜 저 사람에게 반응하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높은 질문(열린 질문)을 해 보기로 하자.

결국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 자신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자신이 던지는 질문의 수준만큼 사유한다. 마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 세계의 한계를 알기 위해 오늘도 독서를 하며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있다.



[참고 도서]


1. 플라톤, <파이드로스>

2. 어술러 르 귄, <어둠의 왼손>

3.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4. 김유정, <동백꽃>

5. 나쓰메 소시키, <몽십야>

6. 장 그르니에, <섬>

7.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8. 다비드 드 브르통, <걷기 예찬>

9.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10. 니체, <우상의 황혼>

11.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자본론>

12. 다윈, <종의 기원>



2026. 2. 23~3. 4, 중국 上海에서 읽고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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