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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철학

알랭 드 보통, <불안>(2004)

by durante

[1분 요약]

<불안, Status Anxiety>은 '일상의 철학자'로 불리는 알랭 드 보통이 저술(2004)한 일종의 인문철학 에세이다. 그는 불안을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라 정의한다. 그 불안의 원인으로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5가지로 규정하고,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적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또 그 지위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그의 불안에 대한 견해는 독창적 사상이라기보다는 스토아철학,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사회학, 심리학, 낭만주의적 인간학을 다소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성의 철학, 염세주의 및 허무주의 철학을 강조하고 소설, 그림, 비극 및 희극(유머, 농담, 만화를 포함하여) 등 예술을 통해 삶의 비평('삶 자체에 대한 해석과 성찰')이라는 정의를 공유한다고 말한다. 불안의 해법 중 '정치' 편을 통해 돈이나 부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강조하며, 근대 산업 생산과 정치 변화로 생겨난 지위 불안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이해할 경우, 늘 문제를 막지는 못하지만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위계(지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의 보헤미안 운동, 20세기 다다이즘(Dada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은 사회 행동 규칙으로부터의 탈피, 기존 질서의 부정, 부정 이후의 예술을 주창하게 된다.


나는 저자가 불안의 원인을 다소 명료하게 규정하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 점에서 존경할 만 하나, 정말 기독교가 불안을 해소하는 해법으로 충분히 설명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원 제목인 지위 불안은 왜 그냥 '불안'이 아니고 '지위 불안'인지도 궁금하다.

뉴욕시립대학교(CUNY) 철학 교수인 사미르 초프라(Samir Chopra)는 "불안을 철학하면 불안을 치유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에, 그의 책 <불안을 철학하다, Anxiety>를 더 읽어보고 알랭 드 보통에 대한 내 편견을 수정해 보고자 한다.




[들어가며]


나이가 들면서 수면시간이 줄어들고, '불안'을 느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애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계속 읽을거리 앞에 올려놓는데 그 분량에 '불안감'을 느끼는지 도무지 읽기를 시작하지 못한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고 정리하면서 또 '불안'이란 단어를 만난다. 잠시 독서로 잊혔던 불안이 다시 밀려온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보면 '불안'은 '인간의 근본 기분'이라 하는데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의 지혜를 빌려보기로 했다.



[저자 정보]


한국 애독자를 많이 보유한 알랭 드 보통은 스위스 취리히 생(1969)이다.

책의 작가 정보에 의하면,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철학 석사를 받았으며, 하버드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물셋에 발표한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를 시작으로 《우리는 사랑일까 The Romantic Movement》 《키스 앤 텔 Kiss and Tell》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The Course of Love》이 전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했다. 철학 에세이와 픽션이 절묘하게 조합된 이 독특하고 대담한 소설들로 ‘이 시대의 스탕달’ ‘닥터 러브’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 이 밖에도 그는 철학이 필요한 다른 여러 삶의 영역들에 대해서도 폭넓은 통찰을 선보여 왔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철학의 위안》 《여행의 기술》 《불안》 《행복의 건축》 《일의 기쁨과 슬픔》 《뉴스의 시대》 등으로 이어지는 행보는 그에게 세계적 명성과 더불어 ‘일상의 철학자’라는 명실상부한 수식어를 안겨주었다. 이 밖에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 실생활을 위한 철학을 지향하는 ‘인생 학교’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03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지위 불안의 정의]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8p)




[원인]

1. 사랑 결핍

ㅇ 우리는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든다.(15p)

ㅇ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써 - 더 중시된다. 만일 플라스틱 원반을 모으는 대가로 사랑을 제공한다면, 우리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으로 인해 열렬한 갈망을 느끼기도 하고 불안에 떨기도 할 것이다.(15p)

ㅇ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을 통해 "(...) 부자가 자신의 부를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의 관심을 끌어모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했고,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사회에서 밀려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벌은 없으며(...)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 한다.(18, 20p)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사랑 결핍으로 인한 불안으로 설명하는 주장을 더 살펴보자.

심리학적으로 불안은 감정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확실성은 심리적 불안정을 가져온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불안은 위험에 대한 경고 신호로서 생존을 위한 당연한 것이지만, 과도할 경우에는 병리적 불안(불안 장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과도함이란 강도(Intensity), 지속 기간(Duration), 통제 가능성(Control), 기능 손상(Functional impairment)에 대한 대처 가능 여부에 따른 것이다.

사랑 결핍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을 주장하는 대표자는 당연 프로이트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가장 깊은 불안의 근원이다"
- 프로이트(S. Freud) <문명 속의 불만> -


나는 보통의 사랑결핍이 이성으로부터는 애정결핍, 사회 구성원으로부터는 인정결핍과 같다고 생각한다. 애정결핍으로 나타나는 불안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어 타인에게 집착하거나 회피하는 불안형 성격을 형성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불안(Anxiety)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존재론적 상태, 즉 인간이 ‘자유’와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느끼는 근원적 불확실성으로 본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키르케고르(Kierkegaard), <불안의 개념(The Concept of Anxiety)>(1844)


"불안은 존재 그 자체가 무로 드러나는 체험이다.”
- 하이데거(Heidegger) -


"불안은 자유에 따르는 필연적 고통이자,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 사르트르(Sartre) -


사랑 결핍으로 인한 불안을 주제로 내가 좋아하는 세계 문학 소설은 토마스 하디의 <테스> (1891)이다. 테스는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사회의 이중잣대와 도덕적 위선 속에서 파멸한다.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1979)도 감상해 보자.


2. 속물근성(snobbery)

ㅇ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다.(27p)

ㅇ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38p)


심리학적으로는 속물근성과 유사한 주장으로는 프로이트의 도덕적 불안(moral anxiety),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소유지향적 인간' 및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열등감(inferiority feeling) 등을 들 수 있겠다.

프로이트는 ‘자아(ego)’가 초자아(superego)의 도덕적 불안이 사회 규범과 타인의 시선에 의해 위협받을 때 생긴다고 하며,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소속되지 못할까 봐 느끼는 고립감이 불안을 일으키므로 존재보다 소유를 중시하는 것을 비판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사회적 비교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우월성 추구’(striving for superiority)로 보상받으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타인의 인정을 얻지 못하면 불안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는 루소의 '허영심', 쇼펜하우어의 '끝없는 욕망의 순환', 니체의 '노예 도덕' 및 사르트르의 '타자의 시선'과 유사하다.


저자의 '속물근성'은 사회적 지위와 타인의 인정을 향한 집착이 불안의 근원이란 측면에서 볼 때 상기 심리학적, 철학적 의견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겠다.


이 책에서 소개한 속물근성의 예가 나오는 소설 문학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식당 점원이 부르주아 내레이터를 그의 남루한 모습에 무시하다가 그의 친구 생루 후작과 동석하는 것을 보고 바로 내레이터를 귀족으로 대우하는 것이 바로 속물근성의 한 예이다.

나는 이 소설이 너무 장편이어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올해 초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의 <고백의 언어들>을 읽으면서 목사님의 추천에 구매하고 잘 모셔두고 있다. 이렇게 내게 반복적으로 추천되는 경우에는 난 읽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3. 기대

ㅇ 부, 존중의 적절한 수준은 결코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준거집단(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57p)

ㅇ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 상태다." - 데이비드 흄 <인성론> - (59p)

ㅇ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 - 윌리엄 제임스 - (72p)


저자는 이 '기대'라는 불안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근대 이후 많은 사상가와 지식인의 의견을 빌려온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평등'을,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1790), 앤서비 로빈스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1991) 등의 교화서로부터 이를 달성하지 못한 일반인을 슬프게 만들고,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부에 대한 갈망(열망)이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참 인생에는 아이러니가 많다. 인류는 행복을 위해 평등을 외치며 목숨을 바치기도 했지만 그 평등 때문에 다시 고통받고 불안을 느끼게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한 자들의 교화서를 따라가도록 좋은 안내서가 되지만 때로는 따라갔음에도 또는 덜 노력해서 달라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큰 실망을 주고 불안을 주는 것이다.


과도한 기대로 인한 불안을 주제로 한 세계 소설 문학 중 대표적인 것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아닐까 한다.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사랑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절대적인 이상으로 삼고, 자신을 끊임없이 재창조하지만, 그 기대는 현실과 어긋나고, 결국 허무와 파멸로 귀결된다는 내용인데 나는 많은 영화 평론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드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의 장면들이 잊히지 않는 다.



한편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영향을 준 소설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소설 <노르웨이 숲>에서 와타나베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이후 정말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책장에서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늘 감동적이었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이다.


4. 능력주의

ㅇ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인 3가지 이야기

1)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2)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3)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ㅇ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3가지 이야기

1)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 있다.

"그들(부자)은 이기심과 탐욕을 타고났지만,
그들은 오직 자신의 편리만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고용하는 사람들의 노동으로부터 그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의 만족뿐이지만,
결국 부자들은 모든 개선의 산물을 빈자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마치 땅을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생활필수품을 고르게 분배하며, 그 결과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고 종의 증식 수단을 제공한다" (100p)
- 애덤 스미스 <국부론> -


참 용기가 가상할 만큼 이상기도 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 등장하는데 그 손은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잠시 <도덕감정론>으로 들어가 보자.

"부자는 오직 가장 귀중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것만 선택한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보다 단지 조금 더 소비를 할 뿐이다. 부자들의 자연스러운 이기심과 탐욕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단지 그들의 편의를 의도할 뿐이더라도, 그들이 고용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안하는 유일한 목적은 그들이 지닌 허영심과 만족할 줄 모르는 열망이라는 희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모든 생산물을 빈자들과 나눌 수 있다. 부자들은 지구가 이 땅의 모든 거주자들에 동등한 몫으로 나누어져 있더라면 만들어졌을 생활필수품을 거의 똑같이 나누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는 것이다. 이윽고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회적 이익을 증진시키며 종족의 번식을 유도하는 것이다"(도덕감정론, IV.I.10)


애덤 스미스는 두 저서 모두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개인의 이익 추구와 사회적 이익의 연결을 보여주지만, <도덕감정론>(1759)은 도덕적 감성과 공감(sympathy)에, <국부론>(1776)은 개인의 이기심(self-interest)에 더 초점을 둔 것이다.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은 사실 타인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빈자가 이런 연유로 부자에 속한 사람들의 암묵적 비난(부자는 국가의 번영을 주도하고, 유순하게 기능적 역할만 한다는 비난)까지 받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고 설명한다.


2)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부에 대한) (...) 개인적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경제적 실패는 (...) 수치심과 연결되었다.(113p)


3)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영국의 사회진화론자 하버트 스펜서는 <사회 통계학>에서 생물학적 원리 자체가 자비라는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15p)

사회진화론은 노동조합,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 반박할 수 있는 막강해 보이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116p) 앤드류 카네기 역시 "자선행위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차라리 바다에 버리는 게 낫다"(117p)고 할 정도였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119p)


결국 '부'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에 따른 '부'의 여부가 불안을 야기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가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은 “존재의 무가치감”과 “성과불안(performance anxiety)”을 느끼는 것이다.


“성과 중심의 노동은 인간을 ‘활동하는 존재’가 아닌 ‘생산되는 존재’로 만든다.”


5. 불확실성

1) 변덕스러운 재능

마치 뮤즈(Muse)가 빼앗아 가는 것처럼 변덕스럽게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재능의 힘에 의해 우리의 인생 경로와 경제적 능력이 결정된다.(125p)

오랜만에 뮤즈란 용어를 만난 김에 화가 엘로이즈라는 살아있는 뮤즈를 만날 수 있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2020)을 잠시 감상한다.



기억에 남는 영화 속 대사 : (영화 속 마리안느가 이별하기 전 엘로이즈와의 대화)


(엘로이즈) "나는 뭔가 새로운 감정이 느껴져. 후회"
(마리안느)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



2) 운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운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127p)

3) 고용주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128p)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130p)
- 라 브뤼예르 -


장 드 라 브뤼예르(1645~1696)는 1688년 당시의 풍속과 사람들의 성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레 카라크테르>를 출판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는데 이 기회에 세계사상전집 <바보예찬 잠언과 성찰 인간성격론>을 읽어볼 계획이다.

4) 고용주의 이익

회사가 이윤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 언제나 피고용자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1968년 ATM 등장으로 ATM 1대당 37명의 은행 출납계원 일을 대체하였고, 철도가 운하를, 제트 엔진이 여객선을, 자동차가 말을, 컴퓨터가 타자기를 밀어냈다.

최근 AI 열풍으로 인한 인원감축이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Amazon이 2033년까지 업무 75%를 로봇으로 자동화하여 60만 명을 해고할 계획을 세웠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인사팀·총무팀 빼고 다 자른다”…60만 명 해고계획 세운 이 회사 - 매일경제)

5) 세계 경제

마르크스는 칸트를 참조하여 "경제학은 노동자를 오직 일하는 동물로만 본다.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보는 것이다." (1844 경제학 철학 초고)


정리하면, 우리의 재능이 늘 일정하지 않고 때로는 운이라는 불확정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기도 하고, 특히 고용주가 아닌 노동자의 경우에는 늘 해고의 불안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는 과거보다 훨씬 많은 선택과 자유를 제공하지만, 그로 인해 불확실성과 책임도 증가하여 우리는 오히려 자유의 부담 속에 살게 된 것 같다.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1938)는 이러한 자유의 실존적 부담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가 곧 무한한 책임과 방향 상실의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1951)도 '무한한 선택이 주어졌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현대 청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해법]

1. 철학

저자는 근대 유럽(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에서 명예 때문에 흔히 일어나는 결투 현상을 언급한다. 결투는 결국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결정되는 자존심의 문제이고 이로 인한 지위 부정은 우리를 괴롭힌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는 지위에 불안을 느끼지 않는 철학자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 디오게니스, 안티스테네스 등이 있었다. 타인의 불공정한 명예에 대해 '이성'으로 극복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나 업적에 대하여 하는 말 때문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되며, 먼저 이성으로 그런 말을 검토해야 한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ㅇ 지적인 염세주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이다.(165p)
- 쇼펜하우어 -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167p)
- 쇼펜하우어 -


최근에 한국에는 쇼펜하우어 철학 바람이 불은 것 같다. 이 염세주의 철학자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중국의 한 지인도 김지민이 엮은 <쇼펜하우어 인생수업>을 최근에 읽었느라고 추천했을 정도다.




나는 같은 역자의 <니체의 인생수업>을 같이 읽고 토론을 제안했다. 그가 기억하고만 있다면 조만간 열렬한 토론이 기대된다.


대표적인 염세주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눈먼 의지(der Wille)”의 산물로 보고,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결핍과 욕망의 추구이며, 그 충족은 일시적일 뿐 다시 새로운 결핍이 생긴다고 한다. 따라서 불안은 의지가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되며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원하면서도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불안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불안은 결코 해소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길 밖에 없다.

① 예술적 직관 — 예술 감상은 욕망을 잠시 중단시키고, 세계를 ‘순수한 관조’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한다.

② 금욕과 자비 — 불교적 영향을 받아, 욕망을 줄이고 타자에 대한 연민을 실천함으로써 불안을 넘어서는 삶을 제시


허무주의자로서 니체의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가치 붕괴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영적 위기로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초인(Übermensch)’의 이상을 제시하고 초인은 외부의 가치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따라서 불안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도약의 계기로 본다.

불안 측면에서 보면 염세주의자는 불안을 수용, 허무주의자는 불안을 극복해야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저자는 허무주의 철학보다는 염세주의 철학을 통해 '지위를 단속하려는 미숙한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불안을 수용하라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나는 때로는 니체의 허무주의가 더욱 희망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1866)은 니체의 초인 사상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위대한 인간은 법을 초월할 자유가 있다”라고 믿고 살인을 저지르는 니체의 초인에 자주 인용된다. 그런데 니체의 초인이 언급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883년에 출간되었으니 시간 상 누가 우선인지는 명확하다. 그 전의 저술에 언급되었다고 해도 니체의 최초의 저서인 <비극의 탄생>도 1872년 출간되었으니 말이다. 니체가 초인 사상은 도스토옙스키의 라스콜리니코프로부터 빌려온 것일까? 좀 더 알아볼 일이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이런 편지 글이 전해온다.


“도스토옙스키를 발견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그는 내가 유일하게 무언가를 배운 심리학자다.”
- Friedrich Nietzsche, Letter to Peter Gast, 1887 -


2. 예술

저자는 영국의 시인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를 예를 들며 "예술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삶의 비평)"이라는 암시를 했고 그로 인해 근면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작업장을 떠나 의무를 저버리도록 유혹한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위키백과에 의하면 아널드는 궁극적인 교양이란 '부르주아 문화'를 부흥하여 '대중문화'를 제거하는 것으로, 노동계급에게는 종속과 복종의 감각을 되살려주고, '부르주아 문화'를 부흥하여 중산층을 세련되고 관대한 계급으로 교육하여 노동계급의 귀감의 대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매슈 아널드의 교양론은 문화적 복종을 강조한 사회질서유지를 지향하는 '엘리트주의'적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아널드가 노동자를 위한 예술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더 확인해 봐야겠다.


소설 속에서의 지위는 인생에서의 지위와 바뀐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오만과 편견>으로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 파크>의 페니(버트람 가족이 아닌),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고리오(마담 드 뉘싱겐이 아닌), 하디의 <미천한 주드>의 가난한 석공(옥스퍼드 연구원이 아닌), 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1871∼1872)의 도로시아 브룩(성 테레사가 아닌),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의 방글라데시인 웨이터 사마드(귀족 손님이 아닌) 등의 소설 속 주인공이 대표적이다. 모두 내가 읽었거나 읽을 리스트에 올라있는 책들인데, 특히 <미들 마치>는 영국 농촌의 평범한 삶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치 나는 다른 책을 읽은 듯이 알랭 드 보통의 주장이 새롭게 느껴진다.

"도로시아도 성 테레사처럼 많은 덕을 갖추었지만 지위의 상징에만 관심을 가지는 세상의 눈에는 그 덕이 보이지 않는다"(186p)

지금도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동일한 주장을 (평범한) 내가 할 때와 권위와 지위를 가진 자가 주장할 때 청자의 반응이 사뭇 다름을 익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미들 마치>에서 도로시아의 행동과 삶은 한국 소설(한승원 원작)과 영화로 제작(임권택 감독)된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의 순녀(강수연 역)와 무척 닮아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리일까?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로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는 뜻인데, 초월적 이상 세계를 쫓는 진성과 파계하고 세속을 떠도는 청화(순녀)를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미들 마치>의 성 테레사와 도로시아의 대비와 닮았다.



저자는 이제 미술로 넘어간다. 1648년부터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회화의 등급을 정했다는 것에 화가 난다. 역사화(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등), 초상화(특히 왕, 왕비), 풍경화, 풍속화의 순이라는 것이다.

미술에 특히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기회에 그 프랑스 미술 등급의 '저속한, 경멸적인' 등급인 풍속화를 그린 장-밥티스트 샤르댕의 <회복기 환자의 식사>(1746)를 깊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장 밥티스트 샤르댕 1746년 <회복기 환자의 식사>


샤르댕의 예술은 여자가 집 안에서 하는 일 또는 오후 햇빛에 반짝거리는 낡은 도기를 하찮게 여기는 인생관을 전복해 버린다.("샤르댕은 배 한 알이 여자만큼 생명으로 가득할 수 있고, 물단지가 보석만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렇게 말했다)(191p)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빨래하는 여자>, 1733 * 출처 : 채널예스


식사 기도(1740), 출처 : 네이버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에는 이 장-밥티스트 샤르댕의 작품에 대한 사연이 소개되어 있으니 다시 읽어 보도록 하자.

샤르댕 외에도 토머스 존스, 크리스텐 쾨브케 등의 그림에서도 세상에서 존중하고 존경할 것은 평범한 사람의 생활 속의 평범한 인간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 예술 부분을 읽으면서 2013년 알랭 드 보통이 <영혼의 미술관>을 저술한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본다.


비극을 본 관객은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앞에서 슬픔을 느끼고, 그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진다.(204p)


내가 생각하는 비극은 평범한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일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 아리스토텔리스는 이를 하마르티아 hamartia, 판단의 잘못이라 부른다 - 이라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는 그 행위가 부당하다고 해도 그를 비난하기 어려운 것, 그것이 비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비극 <오이디푸스왕>의 줄거리가 신문에 게재된다면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다"라는 머리기사로 단순히 실패 이야기의 뼈대만 읽었겠지만, 비극을 통해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릴 것이라 설명한다.

마치 1848년 델핀 들라마르의 외도 및 자살 사건과 이를 기반으로 집필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나다니엘 호손 <주홍글자>, 서머셋 몸 <인생의 베일>과 함께 세계 4대 불륜 소설의 하나라 한다. 로렌스의 <차탈레 부인의 사랑>을 추가하고 싶은 독자도 있겠지만 말이다.

최근 김기석 목사의 <고백의 언어들>을 읽으면서 그리스 비극을 다시 읽은 적이 있다.([독서]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포함하여 비극에 대한 정리는 별도로 하기로 한다.


저자는 희극, 유머, 농담은 불만을 제기하는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존 드라이든에 의하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내가 즐겨 보는 일종의 만화가 있는데 '한겨레 그림판'이다. 어쩌면 이렇게 시사 이슈를 재미있고 적절하게 표현하는지 그 창의성에 매번 놀란다.


2025년 10월 20일 자 그림판. 다소 정치적인 이슈이지만 사실만 가지고 봐도 정말 창의적이고 교훈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소설, 그림, 비극 및 희극(유머, 농담, 만화를 포함하여) 등 예술을 통해 삶의 비평('삶 자체에 대한 해석과 성찰'이란 의미일 것이다)이라는 정의를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불안의 원인 중 특히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등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예술이 불안에 대해 정확히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건 내 이해력의 부족인지 모르겠다.

예시로 제시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등을 읽고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3. 정치

저자는 지역사회 및 역사적으로 지위가 계속 변화해 왔으며, 이로 인해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도 바뀌어간다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지위의 변화 과정을 정치라고 규정한다. 상업적 능력주의 상황에서는 돈이 미덕(선)의 증거가 된다. 즉, 부에는 '품위'가 따라붙고 가난에는 '상스러움'이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소스틴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 의하면 돈이 상업적 사회가 그 구성원을 평가하는 중심 기준으로 등장했다고 묘사했다. 여기에서 유한은 有限이 아닌 有閑(Leisure)을 말하는 것으로 합리적 소비가 아닌 사회적 소비, 즉 과시적 소비를 비판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플렉스(FLEX)라는 용어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상세 설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Youtube 채널 중 하나인 알릴레오 북's를 참조하자([알릴레오 북's 37회] 우리가 플렉스 해버린 이유? / 유한계급론 - 이주희, 오찬호, [알릴레오 북's 38회] 어떻게 빈곤층은 보수화 되는가 / 유한계급론 - 이주희, 오찬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 몽테뉴 등처럼 상업적인 능력주의에 문제를 제기한 여러 사상가들이 있다.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는 우연의 역할을 잊지 마라. 우연이 능력보다 앞서는 것이 자주 있다.(257p)
(몽테뉴)


조지 버나드 쇼는 192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서, 풍자의 묘미를 선보인 영국의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시적 아름다움에 스며있는 재기 발랄한 풍자로 이상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에 위치한 그의 작품을 기리며”
– 1925년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쇼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성녀 조앤(Saint Joan)>은 70세 무렵이던 1924년에 발표된 말년의 대작이다. 또한 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준 <피그말리온(Pygmalion)>은 1938년에 영화화되어 쇼에게 아카데미 각본상을 안겨주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그의 <피그말리온>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My Fair Lady'(1964)의 원작이다.


존 러스킨은 인도주의 경제학자로 유명한데, 간디는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러스킨의 가르침에 따라 내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책 한 권을 들라면 바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들겠다.’고 그의 수필집에 썼다고 한다.


저자는 근대의 성공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예시로 들고 있다. 10여 년 전 한 때 루소의 삶과 철학에 매료(?)되어 그의 평전 <인간불평등의 발견자>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적이 있다. “고결한 천재, 성자와 같은 인물, 혁명의 아버지”와 “불안한 정신병자, 비열한 인격의 소유자, 파시즘의 선조”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인 이 분에 대해서 역시 후일 다시 정리해 보기로 한다.

돈과 행복의 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는 상당히 많이 나와 있는데, 2017년 처음 중국 근무를 시작했을 때 "과연 중국인의 행복감은 한국인보다 높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만나는 중국인 대부분이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야 한다'며 늘 "开心"을 외쳤기 때문이다.

UN이 조사 발표한 2025년 세계 행복지수(World Happiness Report)를 보면 핀란드가 8년 연속 1위를 차지했으며, 한국은 147개국 중 58위, 중국은 72위에 랭크되어 있다. 2017년은 어땠을까? 노르웨이가 1위였고 한국은 56위, 중국은 79위였다.

내가 경험한 중국인의 행복감과 차이가 있는 결과에 계속 놀란다. 중국인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开心"을 외친 것인지, 아니면 행복감을 조사하는 기준이 다른 것인지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참고로 중국이 조사한 '2023 중국 행복지수'에 의하면 50개 도시 중 1위는 장쑤성 난징(南京), 2위는 항조우다.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인 상하이는 16위로 허페이(4위) 보다 낮다.(살기 좋은 中 도시 어디? ‘2023 중국 행.. : 네이버블로그)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271p)
- 존 러스킨 -


1900년대 초까지 여성과 유색인종은 백인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어 왔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278p)
- 칼 마르크스 -


여성에 대한 이런 지위 변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 <자기만의 방>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작가이자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안한 선구자로 후대에 페미니즘 사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작가이다. 그녀가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을 들어가려 했을 때 "여자 혼자는 도서관을 들어갈 수 없다"라며 제지를 당했다.

케빈 코스트너가 (아주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Hidden Figures, 2017>에 있었던 유사한 장면이 떠오른다. NASA에서 근무하는 천부적인 수학 능력의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중요하게 본 것은 그런 여성 차별보다 이의 문제성을 바로 직시한 리더인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 역)이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 안내판을 부숴버리고, 여성은 참여할 수 없는 보안회의에도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을 참여시키며 결국 미국이 소련과의 우주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실화 영화이다.



실제로 캐서린 존슨은 2015년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민간인 최고의 상인 '자유의 대통령 훈장'을 수상했다.

다시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앞서 언급한 도서관 출입 제지 사태 관련한 그녀의 대응은 참신하다. 그녀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를 묻지 않고 "나를 들여보내지 않는 도서관 문지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를 물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장애에 부딪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는 반성은 칭찬받아야 한다. 그런데 울프처럼 "혹시 그 장애를 일으키는 주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라고 더 의문을 가진다면 더욱 칭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협상 기술'에서 표면에 나타난 문제보다 "상대방의 우려, 걱정을 파악하라"는 원칙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자는 불안의 해법 중 '정치' 편을 통해 돈이나 부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강조하며, 근대 산업 생산과 정치 변화로 생겨난 지위 불안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이해할 경우, 늘 문제를 막지는 못하지만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기독교

저자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명성과 부를 얻고 난 후 그가 자신 또는 신의 가치가 아닌 사회의 가치에 따라 산 것을 후회하며,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저술했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은 노벨연구소가 2002년 세계 유명작가 54명에게 설문조사를 통해 세계 문학사에 가장 훌륭한 작품 100권 중 하나로 선정된 적도 있다.(틀:노벨연구소 선정 역대 최고의 책 - 나무위키) 죽음에 대해서는 철학의 큰 주제 중 하나이므로 이 역시 별도로 정리하기로 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서평이나 독후감으로 출간된 것이 더 있는지 모르나 최근 읽고 있는 문형배의 <호의에 대하여>에도 간단한 독후감이 실려 있다(279p). 이 소설은 모파상이 “나의 작품 100편이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보고서 알았다.”라고까지 말했다고 하니 한번 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참고로 2023년 개봉한 영화 <리빙 : 어떤 인생>도 시청해 보기로 한다.


"사랑을 미루지 마라"라는 톨스토이의 일화를 떠올리다가 우연하게도 최근에 감상한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로 선정할 만한 영화가 있었는데 <조 블랙의 사랑, Meet Joe Black>이다. 이 영화에 대한 내 한 줄 감상평은 "사랑과 죽음이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을까?"였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 준다.


저자가 참조한 앤드루 마블(Andrew Marvell, 1621~1678)의 시 <수줍은 애인에게, To His Coy Mistress> 일부를 잠시 감상한다.

To His Coy Mistress Had we but world enough, and time,
This coyness, lady, were no crime.
(...)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

(수줍은 여인에게 우리들이 충분한 세계와 시간을 갖고 있다면
여인이여, 그대의 이 수줍음은 아무런 죄가 아니겠지요.
(...)
하지만, 나는 항상 듣는다오, 바로 나의 등 뒤에서,
날개 달린 시간의 마차가 황급히 다가오는 소리를)


단순히 내용만 보면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즐기자는 것인지, 역설적으로 이상적, 종교적 사랑을 강조하고자 한 것인지 명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죽음이란 문제에 봉착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 초연해지고 어느 위압도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니까 불안 정도야...

기독교 도덕가들은 시간의 흐름과 폐허, 광대한 풍경처럼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면 이 지구는 한 점, 그것도 창백한 점에 불과하지 않던가?



현대 세속 사회 입장에서는 "올바른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목표는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의 재능이 허락하는 방법으로 '튀는' 것이다."(328p)

그러나 기독교는 보편적인 진리에 초점을 맞추라 한다.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한다. 어린아이를 보면 자고 있는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자고 있는 사람을 보면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다양한 심리학적, 뇌신경학적 연구를 성급히 종합해 보면 우선 신뢰와 안전감을 느끼게 되고(Sleepy around your partner? This is what it could mean | Vogue India), 커플이 함께 잠을 자는 경우에는 심지어 REM 수면 증가 및 수면 패턴 동기화가 관찰되기 한다고 한다.(Sleeping With a Partner Associated With Increased REM Sleep, Synchronization of Sleep Architecture | AJMC)

참 인간의 심리와 몸은 알아갈수록 신비하고 재미있다.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 사회적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진다. 그러나, 예를 들어 기독교의 성가인 바흐의 <B 단조 미사, Mass in B minor, 1749>를 들으면 공동의 핵심을 공유하며 황홀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334p)


기독교에서의 지위에는 세속적 지위와 영적 지위가 있다. <누가복음 16:19-31>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온다. 요약하면 나사로는 병든 채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지지만, 죽은 뒤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천국)에 들어가나,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받으며,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애원하지만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즉, 세속적 지위에서는 넝마밖에 없지만 영혼은 거룩한 부를 자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를 통해 부자는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 말일까? 송태근 목사의 CBS 성서학당은 이에 대한 명확한 의견을 제시한다.((2737) 송태근목사 누가복음 43강 "거지 나사로 이야기 속의 부자"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 YouTube) 여기서 부자는 당연히 모든 부자를 대상으로 언급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부자이고 (하나님이 아닌)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지위와 영적 지위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세속 도시"와 "신의 도시"로 나뉘고, 단테는 <신곡>에서 무려 9의 지옥으로 나뉘기까지 한다. 기독교는 위계(지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단테의 <신곡> 읽기를 몇 번이나 시도했는지 모르겠다. 여러 경로로부터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권유받았지만 아직 완독을 못했다. 당연 내가 게으른 탓이다. 그때 참조할 작정으로 여러 개의 강의 동영상을 찾아 잠시 시청한 적이 있는데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의 강의를 추천한다.(배철현의 단테 : 희극의 탄생 Introduction 1 Dante - The Divine Comedy)-2년 전인가는 무료였는데 지금 보니 유료로 전환되어 다소 아쉽지만..-. 무료인 신문 기사도 있다.(배철현의 ‘21C 대한민국과 단테의 신곡’… 혼돈의 시대 헤쳐 나가는 자기성찰의 여정- 매경ECONOMY)

못 가진 자들은 세속적 가치의 권위에 대항하는 요새, 즉 성당을 세운다. 프랑스 고딕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높이 130m의 샤르트르 대성당이 그 한 예다. 이 성당에는 예수가 태어날 때 성모 마리아가 입었다는 옷(베일)이 성유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 안에 머무르는 가난한 자들의 마음은 지상의 초라한 거처를 잊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성당에 대한 미스터리(에티오피아의 시바여왕 관련)도 있다고 하니 참고하기 바란다.(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출처 : CC BY 2.5,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93808


이쯤에서 연주 음악 시바의 여왕(La Reine De Saba (시바의 여왕)- Raymond Lefevre [연주곡, 경음악])을 듣고, 시바여왕이 솔로몬을 유혹한 키피와 관련된 사연도 들어봄직 하다.([커피인문학] 커피로 솔로몬 왕을 유혹하다. 에티오피아의 탄생.), 영화 <솔로몬과 시바 여왕>(1959)도 관람해 보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구하지 못한 아쉬움에 BBC 다큐멘터리로 대신한다.(악마의 여왕? 중동과 아프리카에 남은 시바여왕의 흔적을 찾아서 | 신화와 영웅을 찾아서 1부 신비의 여인, 시바여왕 #BBC)


시바 여왕 관련 성경 문구.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열왕기상 10: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누가복음 11:31)


이 부분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더 읽어보고 베버와 저자의 견해와의 연관성을 더 고민해 보도록 하자.


5. 보헤미아

보헤미안(bohemian)은 사전적 의미(Merriam-Webster’s Learner’s Dictionary)로 '사회에서 허용되는 행동 규칙을 따르지 않는 예술가나 작가 같은 사람(a person (such as an artist or writer) who does not follow society's accepted rules of behavior)'으로 정의된다.

보헤미안은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의 생활>에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는데, 유명한 오페라 푸치니의 '라 보엠(La Boheme)'은 그 소설을 기초로 한 작품으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시작되는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오페라가 언급된 김에 라 보엠의 유명한 아리아 하나 감상하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인기 있는 곡 중 하나는 오페라에서 로돌프가 미미를 유혹하는 "그대의 찬손"이다. 이 노래는 카를로 베리곤치가 제격이란 평가가 있는데 난 언제나 파바로티다.(Luciano Pavarotti Che gelida manina (루치아노 파바로티. 그대의 찬손))


"손이 무척 차갑군요! 제가 따뜻하게 녹여드릴게요
이런 어둠 속에 찾아봐야 소용없는 일이에요"


이 책에 인용된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증오는 참 냉소적이다. 그들은 하찮은 것들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멜론은 야채냐 과일이냐, 그것을 첫 번째 코스(프랑스식)로 먹어야 하느냐 아니면 후식(영국식)으로 먹어야 하느냐..."(354p)


멜론 먹는데 순서가 있고, 그것이 국가별로 다르다는 것이 우습고 씁쓸한 생각이 문득 뜬다. 평소 주위에 이런 하찮은 것을 가지고 일일이 따지는 친구나 동료 한 명쯤은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측면이긴 하겠지만 그래서 알베르 까뮈도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


<적과 흙>, <파름므의 수도원>의 작가 스탕달은 현재까지 나온 모든 ‘연애론’이 스탕달의 <연애론, De l'Amour>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 <연애론>의 서문에서 부루주아지를 이렇게 공격한다.

"돈은 많지만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 1년에 10반 프랑을 버는 사람이 이 책을 펼쳤다면 다시 닫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간디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한 <시민 불복종>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월든, Walden>(1854)에서.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왜 보헤미안 예술가들은 자살을 많이 하는 걸까? 영국 시인, 토마스 채터튼은 18세에, 시인 제라드 네르발은 47세에, 에드거 앨렌 포는 37세에 자살한다.


출처 : By Henry Wallis - Google Arts & Culture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소설 <인간 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1909~1948)도 39세에 자살했었지. 일본 데카당스 문학도 '규범에서 벗어난 삶'을 강조한 점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보헤미안과의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서로 극단은 닿아 있다고 했던가... 자유의 극단은 죽음인가, 아니면 죽음은 예술가로서 순수성에 대한 극단의 표현인가...

저자의 이 문장은 참 아름답다.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372p)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은사 격이자 그의 저서 <월든>의 실 거주자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자기 신뢰, Self-Reliance>에서 외친 말.

"인간은 모름지기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372p)


마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예술은 삶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힘”이라 한 것처럼, 보헤미안은 바로 그 명제의 실천자였던 것 같다.


19세기의 보헤미안 운동은 20세기 다다이즘(Dadaism)의 출현을 가져온다.

다다이즘(영어: Dada 또는 Dadaism)또는 다다주의는 1 세계 대전 중인 1915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나 1924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예술 사조이자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반문명, 반전통적, 허무주의 예술 운동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하고 야유하였으며 기존의 규범적 예술 영역을 넘어섰다.(다다이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요약하면 보헤미안도 예술과 삶의 문제를 다룬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보헤미안이 자유, 낭만적 저항, 규범과 제도에 대한 저항, 예술을 삶으로 확장하려 했다면, 다다주의는 파괴, 풍자적 반항, 예술과 사회를 해체하고 재정의하려는 급진적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다다의 창립자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의 말.

“다다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 그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다다라는 이름의 어원을 보자. 독일 후고 발이 운영하던 스위스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라는 카페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카바레 볼테르에서 여러 젊은 예술가들이 모임을 열곤 하였는데, 1916 2 어느 날 프랑스어-독일어 사전에 끼웠던 종이 자르는 칼이 우연히 다다라는 단어를 가리켜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단어가 정통주의 미학에 반기를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고 이를 채택하였다고 하니 '무의미의 의미' 자체라 있다.


마르셀 뒤샹의 《샘》


1920년대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가 등장한다. 다다는 예술을 해체함으로써 “예술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시대”를 고발했다면, 초현실주의는 그 파괴의 잔해 위에서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 했다. 즉, 다다가 “부정의 예술”이었다면, 초현실주의는 “부정 이후의 예술”이었다.

초현실주의는 1917 피카소의 친구였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처음으로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를 주창했고, 1924년과 1929년의 차례에 걸친 〈초현실주의 선언(프랑스어: Manifeste du surréalisme)〉과 영향을 받은 많은 운동들에서 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비이성적인 것들과 무의식의 세계들을 그렸으니,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초현실주의자인 살바도리 달리에 대해서는 별도로 알아보기로 한다.


이란의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올빼미>가 초현실주의 문학의 걸작이자 이란 현대소설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들었는데 이 책도 곧 읽어보기로 한다. 참 한국 문학에서 초현실주의의 대표자로는 이상이 있지 않았던가.


잠시 나를 돌아본다. 한 때 사업에 실패하고 삶에 의미 찾기에 방황하다가 소로의 월든 같은 삶을 희망하던 적이 있었다. 결국은 현실이란 핑계에 부딪쳐 다시 돌아온 꼴이지만,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친구와 선배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예술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 유학까지 한 엘리트가 지금 햄버거를 굽고 있는 친구와, 이성적인 사학자, 철학자가 농촌에서 복숭아를 지배하는 선배는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다. 다시 그 친구와 선배가 보고 싶어진다.



저자는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또 그 지위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불안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한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주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글을 맺는다.


알랭 드 보통은 2004년《Status Anxiety》 방영 당시 B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고 한다.


“나는 새로운 철학을 세우려는 사람이 아니다.
오래된 철학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려는 사람이다.”




이 책은 읽기 전의 기대 - 정말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비법이 있는 것인가? - 를 완전히 만족키는 그런 책은 아닌 것 같다. 책 소개글처럼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다만, 그런 탁월한 관점에 고객을 끄덕일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원제인 '지위 불안(Status Anxiety)'과 한국 번역 제목인 '불안'에 대해 몇 가지 떠오르는 기본적 의문이 있다.

1. 역서는 제목을 왜 지위 불안이라 하지 않고 불안이란 제목을 달았을까? 불안과 관련된 대상 또는 유형이 많은데 지위 불안이라 할 경우 관심 있는 독자가 줄어들 것을 염려했을까?

2. 그렇다면, 불안에는 지위 불안 외 어떤 것이 더 있을까?

3. 아니라면, 저자는 불안은 모두 지위에서 오는 불안 밖에 없거나 그것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 것일까?


불안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모르더라도 나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답답함과 불안정함을 느끼게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감정'을 불안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저자의 <불안>과 같은 책을 1독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나의 독후감처럼 길어지는 문제가 있다. 다른 좋은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아쉽지만 재독을 다음으로 미루고 그때 다시 독후감을 보완하기로 한다.

뉴욕시립대학교(CUNY) 철학 교수인 사미르 초프라(Samir Chopra)는 "불안을 철학하면 불안을 치유할 수 있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래서 그의 책 <불안을 철학하다, Anxiety>를 더 읽어보고 알랭 드 보통에 대한 내 편견을 수정해 보고자 한다.


[더 읽을 도서]

1. 스탕달, <적과 흙>

2.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

3.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4. 마르셀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데이비드 흄,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1, 2, 3

6.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

7. 에라스무스, 라 로슈푸코, 라 브뤼에르, <바보예찬 잠언과 성찰 인간성격론>

8. 제인 오스틴, <맨스필드 파크>

9. 발자크, <고리오 영감>

10. 하디, <미천한 주드>

11. 조지 엘리엇, <미들 마치>

12. 서머셋 몸, <달과 6펜스>

13.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 니체,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5.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16.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7. 매슈 아널드, <교양과 무질서>

18. 소스틴 베블런, <유한계급론>

19. 조지 버나드 쇼, <성 조앤>

20.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21. 장-자크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 <인간 불평등 기원론>

22.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23.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24.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25. 단테, <신곡>

26. 스탕달, <연애론>

27.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28. 랄프 왈도 에머슨, <자기 신뢰>

29.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올빼미>

30.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31. 토마스 하디, <테스>

32.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33.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구토>

34.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3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36.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37. 사미르 초프라, <불안을 철학하다, Anxiety>


2025. 10. 21 ~ 11. 05 上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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