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기계발 : <자신감>

랄프 왈도 에머슨, <자신감, Self-Reliance>(2006)

by durante

[나의 1줄평]

"나는 진짜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1분 요약]

<자신감, 자기 신뢰, Self-Reliance>(2006)은 미국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의 선구자로 알려진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의 철학적 에세이 모음집이다. 에머슨은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 미국 여성주의 사상가 마가렛 풀러, 나폴레옹을 포함한 11명의 영웅을 다룬 <영웅숭배론>으로 유명한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 등과 깊은 유대를 가졌다. 이 책은 그의 <제1수필집>(1841)과 <제2수필집>(1844)에서 7개의 소주제(1 수필집 : 역사, 자신감, 보상, 초영혼, 2 수필집 : 경험, 자연, 정치)를 선별한 것이다.

<자신감(Self-Reliance)> 편에서는 "남의 생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영혼이 진실이라 느끼는 것을 따를 용기를 가지라"라고 말한다. 일관성 때문에 자기 생각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경고는 나에게 지속적인 학습과 사고를 독려하는 말이 되었다. '약한 호기심(weak curiosity)' -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 - 을 버리고 판단의 기준을 타인이나 외부요인 아닌 '나'에게 돌리라고 한다.

<경험(Experience)> 편에서는 여분의 날들(에파고메날, Epagomenal Days)이라는 이집트 신화를 통해 카이로스(Kairos) 키르케고르의 순간(Øieblik)’ 개념을 다시 떠올린다. 주변의 삶에 대하여 그렇게 크게 (과장하여) 의미를 부여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미로 '고양이와 그 꼬리를 쫓아 맴돌기'라는 표현도 배운다.

<보상(Compensation)> 편에서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선행을 하면 보상을 받으며, 모든 잘못은 시정된다.'(63p)라며 죄와 벌과 같은 도덕은 사회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법칙 내에서 그렇게 작동된다고 말한다. 누구나 일생을 통해 자기의 결점에 감사해야 한다.(67p)라며 사슴 관련 이솝 우화는 매우 흥미롭다. 조개가 이물질(결점) 때문에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의 결점 자체에 실망하지 말자는 각오도 해본다.

<자연(Nature)> 편을 통해 에머슨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소로우는 '그래서 그는 실제로 자연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된다.

<정치(Politics)> 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개념과도 유사한 "정당한 것을 평등이라 부르고, 평등한 것을 정당하다고 부르지 않는" 스파르타식 원칙을 말한다. 국가와 제도는 불완전한 장치일 뿐이며 진정한 정치적 진보는 각 개인의 양심과 도덕적 자율성이 성장할 때 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역사(History)> 편에서는 E. H 카처럼 주관적 역사관을 말하고 있으나 E. H 카의 견해로 보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고 상호작용이므로 에머슨의 역사관은 다소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Plutarchus, 46~120) <영웅전>의 영향을 받은 에머슨은 “위대한 인물은 사소한 행동에서도 인격이 드러난다”라고 말한다. 에머슨은 진리가 내 안에 있듯이 역사도 내 안에 있고,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처럼 과거의 권위에 종속되지 말라고 하며, 스스로 사유하라고 했듯이 스스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초영혼(The Over-Soul)> 편에서는 인간 각자의 영혼은 하나의 보편적 영적 실재와 연결되어 있으며, 진리와 도덕은 외부 권위가 아니라 그 보편적 영혼과의 직접적 직관적 합일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한다.


에머슨의 도움으로 "나는 진짜 나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묻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니체의 <도덕의 계보>와 라캉의 <욕망이론>을 읽고 생각을 더 연장해 보고자 한다.



[저자 소개] 교보문고 참조 ;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에머슨은 어려서부터 엄격한 도덕률과 이상, 신앙에 열정적이고 충만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난했지만 교회와 숙모의 재정적·정신적 후원이 있었다. 1820년(18세)부터 시작한 평생 일기 쓰기 습관은 그의 사고력을 키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829년에 보스턴 제2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그는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형식을 초월한 내재적 자율성과 인간 영혼의 근원적 아름다움과 힘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습화된 교인들은 에머슨의 신념에 찬 목소리에 감동하면서도 형식화된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나기를 두려워했고 동의하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설교를 끝으로 목사직을 그만둔 에머슨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밀, 콜리지, 칼라일, 워즈워드를 만났다.

1837년 8월, ‘아메리카의 학자’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에머슨의 전기를 쓴 홈스 박사는 이 연설을 미국의 ‘지적 독립 선언문’이라고 일컬었다.

1840년, 마거릿 풀러와 함께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자들의 기관지 <다이얼>을 창간했다.

1845년,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느리게 살기' 위해 에머슨 땅인 월든 호수에 오두막을 짓고 2년여를 살았다.

미국 학술원 회원 선출, 하버드 대학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882년 4월 콩코드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저서로는 『중세 시대의 종교』, 『자연』, 『에세이, 제1시리즈』, 『에세이. 제2시리즈』, 『대표적 인간들』, 『영국적 기질』, 『삶의 태도』, 『5월제 외』, 『사회와 고독』, 『시집』, 『시선집』, 『신생』등이 있다.




[기억할 만한 단어, 문장들]


자신감(Self-Reliance)


13, 자기 자신의 생각을 믿는 것, 스스로 진리라고 생각한 모든 사람에게도 진리일 거라고 믿는 것, 이것이 뛰어난 재주다.

Self-Reliance는 자신감이 아닌 자기신뢰라고 번역해야 맞다고 하는 분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감과 자기신뢰 의미의 차이를 확인해야 한다. 2025년 출간된 <초역 자기신뢰>(필로소피랩 엮음)에 의하면 "에머슨의 자기신뢰는 막연한 자신감이나 믿으면 무조건 된다는 식의 낙관주의가 아니라, 사회의 시선이나 기대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막연한 자신감은 자만심과 유사한 것이므로 자신감과 자기신뢰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그러한 자신감(자기신뢰)과 자만심은 어떻게 다른가? 나의 오래된 고민 끝에 '완벽히 준비'된 사람 만이 자만심이 아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14,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자기 자신 말고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무조건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라!


너 자신을 믿어라. 그러면 그 현의 떨림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15p)

이 문장은 “Trust thyself: every heart vibrates to that iron string.”( 스스로를 신뢰하라. 모든 인간의 심장은 그 강철의 현에 공명한다.)를 의역한 것으로 보이며,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문장이라 한다.


16, 일관성이라면 (...) 오늘 생각한 것은 오늘 총알같이 말하고 내일 생각한 것은 내일 단호한 어조로 말하라. 비록 내일 말한 것이 오늘 말한 것과 모순되더라도

이 부분은 평소 일관성에 대해 매우 강조하는 내 생각과는 반대되는 의견이다. 정말 에머슨은 일관성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보다 자기 생각과 말이 틀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소심한' 사고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틀린 어제 주장을 내일도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자기 생각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틀렸으면 바로 인정하고 변화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일관성에 대한 에머슨의 다른 표현이 있다.

“A foolish consistency is the hobgoblin of little minds.” (어리석은 일관성은 소인배의 유령/도깨비이다.)

일관성에 대해 별도 언급한 것(19~20p)을 참조하면, 가까이 보면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은 일관성의 유연함을 허용한다.


17, 자신감은 사회가 증오하는 것이다. 사회는 실제와 창조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명성과 관습을 사랑한다.

에머슨의 사회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의 예시인 듯하다. 이런 말도 확인된다. “Society everywhere is in conspiracy against the manhood of every one of its members.” (사회는 언제나 개인의 인간다움을 약화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18, 나의 삶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적 철학과 맞닿아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될 때, 자기 삶을 ‘연기’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있어 '남'은 세인(Das Man)인데 세인의 삶을 따를 때 자기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잃게 되고 이것을 비본래성(inauthenticity)이라 한다.


19, 위인이란 군중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철저하게 온화한 태도로 고고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군중의 생각에 휘둘리는 위인은 없다고 치자. 그러나, 보통인은 군중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도록 '군중심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도 한다. 보통인인 나는 어찌할 것인가?


20, 인간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일종의 주정뱅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23, 인간은 감히 "나는 생각한다.","나는 이렇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잘난 성자나 성현의 말을 인용하려 들 뿐이다.

얼마 전 독후감을 남긴 스즈키 유이의 소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에 대한 나의 감상평에서 '명언 같은 말이 권위를 가지고 사용될 때, 우리가 쉽게 믿게 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좋은 말은 출처에서 오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말할 때 또는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될 때 온다"로 연장할 것을 제안해 본 적이 있다.([독서] 문학 :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요즘 한국에서 청소년을 포함한 일부 성인들에게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물으면 "저는 ~한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자신이 결정해서 행동한 것임에도 확실한 의견보다 '같다'라는 형용사를 접미사처럼 사용하는 '소심한' 표현이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은 에머슨의 '자신감'에 대한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갖는 시기이다.


27, 사람들이 나를 괴롭힐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약한 호기심이 그들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 행위를 통하지 않고 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이 나에게 영향을 준 것은 (타인의 원인이기보다) 내가 그런 계기를 준 것임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접근을 하고 못하고는(영향을 주고 안 주고는) 타인이 아닌 내 행위가 결정한다.

그런데 그런 계기가 왜 '약한 호기심(weak curiosity)' 때문일까?

에머슨은 이 부분에서 호기심을 '내가 타인이나 대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에머슨은 판단의 기준을 타인이나 외부요인 아닌 '나'에게 돌리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지나친 개인주의 강조 또는 공동체의 책임이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으니 더 확인해 보도록 하자.

갑자기 지난해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톨스토이의 책 몇 권을 읽다가 만난 <현경과 앨리스의 신나는 연애>의 저자가 주장하는 멋진 문장이 떠오른다.

남들은 나를 오해할 자유가 있고, 나는 그것을 해명할 의무가 없다.


28, 스스로 최고 경영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실로 자기 내부에 어떤 신적인 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고매한 마음과 신념에 찬 의지, 투철한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동의한다. 하지만, 어느 탁월한 경영자에게나 요구되고 구별되는 경영철학 덕분에 그러한 경영자는 대부분 고독한 인간이 된다. 에머슨에게 있어서 고독한 사람은 '비순응자'이다. 다시 또 앤서니 스토(Anthony Storr)의 책 <고독의 위로>가 생각난다.


33, 모방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라. 그래야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자기가 평생 닦아온 축적된 힘으로 매 순간 발휘할 수 있다.

에머슨은 '약한 호기심'에 이어 '모방'을 말한다. 심지어 “Envy is ignorance; imitation is suicide.”(질투는 무지이며, 모방은 자살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내가 타인의 삶을 흉내 내는 순간, 내가 가진 고유한 가능성은 죽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자크 라캉(Jacques Lacan)도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을 한 것인가?


34, 사회는 결코 발전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떠올렸다. 그 배경과 결론에 일부 차이가 있을지라도 무엇인가 '사회는 진보한다'는 주장의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영적, 도적적 차원에서 산업 발전이나 제도, 문명의 진보는 인간을 더 의존적으로 만들고 자율성을 줄여서 내면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보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36, 당신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다.


이 편을 요약하면, "남의 생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영혼이 진실이라 느끼는 것을 따를 용기를 가져라.”


경험(Experience)


41, 오시리스를 탄생시키기 위해 헤르메스가 달의 여신과 주사위 놀이를 하여 이겼을 때처럼

여기에서 언급된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상의 전령, 여행의 신인 Hermes가 아니라, 이집트 신화인 여분의 날들(에파고메날, Epagomenal Days)에 나오는 지혜와 계산의 신인 토트(Thoth)를 말한다.

이 신화에 의하면, 1년이 365일인 것을 이집트 신화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늘의 여신 누트는 대지의 신 게브(Geb)와 결합해 신들을 낳으려 했지만, 태양신 라의 저주로 1년 360일 동안 출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혜의 신 토트(Thoth)는 달의 신과 내기해서 360일에 속하지 않는 다섯 날을 얻어냈고, 그 틈새의 날들 동안 누트는 오시리스(Osiris), 이시스(Isis), 세트(Set), 네프티스(Nephthys), 호루스 등을 낳았다. 이 다섯 신은 이집트 신화에서 핵심을 이루는 존재들로, 이 시기는 곧 신들의 탄생일이자 축일인 ‘에파고메날(Epagomenal Days) 5일’이 탄생 됐다. 이 다섯 날 동안은 대규모 제사나 축제가 열렸고, 1년은 360일 외에 5일이 더해져 365일이 됐다고 한다.([아침뜨락] 달력 한 장을 남겨놓고 < 아침뜨락 < 외부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이 신화는 우리에게 운명(저주)으로 막힌 질서를 지혜와 계산으로 우회하여 새로운 시간이 탄생하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에머슨은 우리 삶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질서의 틈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2가지의 시간 개념이 있다고 한다. 지금 흐르고 있는 달력과 시계의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결정적 순간이나 적절한 시기를 말하는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인데, 에파고메날의 의미로 보면 카이로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내생각] 나의 에파고메날(Epagomenal)) 또한 키르케고르는 『철학적 단편』과 『불안의 개념』 등에서 순간(Øieblik)’을 언급하는데 이는 "시간과 영원이 서로 접촉하는 결단의 지점"으로 존재 방식 자체가 바뀌는 도약(leap)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원작을 더 읽고 정리해야겠다.


45, 인생의 최대 행복은 자신이 찾아낸 것을 질문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세상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먼저 '질문하지 않고 즐긴다'라는 말은 마치 사유를 멈춘다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지나친 반성과 자기 성찰은 오히려 삶의 생동성을 마비시키므로 매 순간을 해부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경험> 편은 <제2수필집>(1844)에 수록되어 있는데 <자기 신뢰> 편이 수록된 <제1수필집>(1841) 이후에 발표된 것이다, 이 기간 중 첫아들이 사망(1842)함으로써 에머슨은 상실 이후의 의식 상태와 경험의 불투명성이 핵심 주제로 등장한다고 하는데, <자신감> 편에서 언급한 자신에 대한 확고함에서 다소 유연해진 것으로 보인다.


48, 나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다가 결국 작은 행복에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지금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평소 기대에 실망을 자주 하는 나에게 똑같은 충고를 하는 친구가 있다. 그가 이 에머슨의 글을 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늘 지금의 행복을 주장하는 현재의 에머슨이라 하겠다.


53, 고양이가 자기의 꼬리를 쫓아 맴도는 귀여운 모습

우리 집의 애완견도 똑같이 가끔 자기의 꼬리를 물려고 빙빙 도는 모습이 떠오른다. 고양이가 꼬리를 쫓아 도는 주변에 많은 희비극과 이야기들이 담겨있지만(고양이가 진지하게 뭔가를 쫓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자기 꼬리를 돌고 있을 뿐이다. 그 주변의 삶에 대하여 그렇게 크게 (과장하여) 의미를 부여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이 이 말에 동의 여부를 떠나 '고양이와 그 꼬리를 쫓아 맴돌기'라는 표현은 참 신선하다.


보상(Compensation)


63, 비밀이란 결국 밝혀진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선행을 하면 보상을 받으며, 모든 잘못은 시정된다. 조용하고 확실하게 모든 행위는 스스로 보상받는다.

인생을 살면서 '착하게 살면 언젠가 보상을 받겠지'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아온 나다. 그동안 그렇지 않은 경우를 많이 경험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산다. 다행히 에머슨도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친구를 만난 듯 기쁨을 갖는다. 그런데 정말 악하게 살면 벌을 받게 되어 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아직도 못 읽은 나를 자책한다.

어쨌든 에머슨에 있어 죄와 벌과 같은 도덕은 사회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법칙 내에서 그렇게 작동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67, 누구나 일생을 통해 자기의 결점에 감사해야 한다.

인용된 수사슴에 대한 이솝우화는 매우 적절한 예이다. 뿔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야윈 다리를 싫어했지만, 사냥개로부터 쫓길 때는 싫어했던 야윈 다리로 살았고, 그 뒤에 그 자랑스러워하는 뿔 때문에 나뭇가지에 걸려 죽었다. 장단점은 상대적인 것임을 다시 기억해 둔다.

그러나 그런 결점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경우도 있다. 진주도 상처 난 조개에서 만들어진다. 조개의 껍질 밑에는 외투막이 있는데, 껍질과 외투막 사이에 이물질이 들어오면 체액을 분비해서 이물질을 감싸게 되고 이것이 두꺼워지면서 진주가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물질(결점)이 없었으면 진주도 없겠지만, 이 상처를 없애기 위한 체액이 없어도 진주는 없는 것이다. 나는 진주를 만들 수 있는 체액을 보유하고 있는가? 관련 동영상을 더 참고해 보자.(조개는 어떻게 진주를 만들어내는 걸까)


자연(Nature)


77, 인디언 섬머 (...) 이런 햇빛 속에서 산다면 언제든지 오래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인디언 섬머는 북아메리카 중, 남부에서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인 10월 말~11월 중순 경에 나타나는 고온 현상이다. 유럽에서는 이와 비슷한 고온 현상을 성 마틴(St. Martin)의 축일인 11월 11일을 전후해 나타난다 하여 '성 마틴의 여름'이라고도 하며, 슬라브권에서는 '늙은 여인네들의 여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반대되는 현상으로 늦은 봄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블랙베리 윈터(Blackberry Winter)가 있다. 한국의 꽃샘추위, 중국의 春寒과 같다.

박신양, 이미연이 주연한 한국 영화 중 <인디언 썸머>(2001)가 있었다. 박신양의 독백이 생각난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여름처럼 뜨거운 어느 날. 신이 선물한 것 같은 인디언 썸머를 기억한다. 내가 그날을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한다는 건 그게 아직 끝나지 않은 까닭이다."

이런 사랑을 하고들 계시는지?


에머슨은 단순히 “자연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우주의 근원적 정신(Over-Soul)을 만나게 되어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참된 존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머슨의 자연에 대한 이런 철학적 토대로부터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월든, Walden>을 서술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머슨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면 소로우는 '그래서 그는 실제로 자연 속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91, 부자는 마치 뭔가 할 말이 있다며 친구들의 대화를 방해 놓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삶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목적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말하고 있다.


다른 글들을 통해 이 <자연> 편의 주된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단순히 '자연 예찬'의 글이 아니라 자연은 인간 영혼과 우주의 근원 정신이 만나는 장소이며,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참된 존재를 직접 경험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하고, 특히 “투명한 눈알(transparent eyeball)” 경험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우주의 흐름이 나를 관통한다.”라는 문장이 유명하다고 하나 내가 읽은 이 책 내에서는 찾을 수 없어서 그의 주장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아 아쉽다.


정치(Politics)


101, "정당한 것을 평등이라 부르고, 평등한 것을 정당하다고 부르지 않는" 스파르타식 원칙

스파르타의 정의(Justice)는 '모두에게 같은 것(평등)'이 아니라 '공동체 질서를 위해 각자에게 알맞은 것'을 말한다. 에머슨은 이 원칙을 가져와서 '정의는 단순한 숫자적 평등이 아니라 질적 적합성(fitness)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개념과도 유사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의하면, 정의는 비례적 평등(proportional equality)이라 보고 정의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공적(merit)에 비례해 주는 것이라 한다.

언뜻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보이나 merit(개인의 재능, 지능, 출신 가정 등)을 '우연'적인 것으로 생각해 보면 merit은 도덕적으로 임의적(morally arbitrary) 이므로 분배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는 존 롤스(John Rawls)의 주장(정의론, A Theory of Justice. 1971)인데, 나는 기본적으로 존 롤스의 주장에 동의한다.


109, 지나친 자유는 단단한 양심으로 발전하지만, 자유의 결핍은 법칙과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양심을 마비시킨다.

'지나친 자유'가 방종이나 무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규제가 적고 스스로 판단한 자유는 내면의 도덕 감각(양심)을 증대시킨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국가의 법규나 회사의 규정을 경험할 경우 '이것이 옳은 것인가?'라 묻지 않고 '이것이 법규나 규정에 맞는가?'라고 묻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자유가 결핍된 것일지 모른다.


110, 정부도 인간의 도덕적 정체성을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

에머슨의 생각은 마치 이전에 읽은 이나모리 가즈오의 <아메바 경영>에서 저자가 경영철학의 기준으로 "훌륭한 인간"을 삼은 것과 유사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에머슨의 정치에 대한 생각은 "국가와 제도는 불완전한 장치일 뿐이며 진정한 정치적 진보는 각 개인의 양심과 도덕적 자율성이 성장할 때 가능하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History)


115, 모든 역사는 주관적이다

에머슨이 역사 서술 방식을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으로 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 해석은 결국 인간 정신의 구조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주관적이라는 의미다.

실증주의적 역사관을 가진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입장에서 보면 에머슨의 역사관은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인간을 추상화하는 위험을 지닌다.

그러나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독서] 역사 :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가의 문제의식과 시대적 관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에머슨의 주관적 역사관은 카의 견해와 일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에머슨의 견해처럼 '나 자신을 보는 거울'이 아니라 E. H 카의 견해로 보면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고 상호작용이므로 에머슨의 역사관은 다소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에머슨은 "자기가 보지 않은 것이나 직접 살아보지 않은 것은 알 수가 없다."라고 까지 말한다.(115p)


116, 120, 모든 개혁도 한때는 하나의 사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사적인 의견이 다시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 되었을 때, 그 의견이 곧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같은 맥락은 아닐 수 있지만 괴테의 말이 생각이 난다. 지난해 험프리 닐(Humphrey B. Neill)의 <역발상의 기술 The Art of Contrary Thinking>의 책에서 "나는 점점 더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쪽이 언제나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괴테의 말이 있었다.([독서] 경영) <역발상의 기술>의 인용 의도는 군중은 감정과 기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군중의 행동과 다른 개인의 행동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인용된 것이다. 괴테의 대화록(Eckermann과의 대화, <괴테와의 대화>)에 의하면 "대중이 나의 작품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먼저 몇몇 현명한 사람이 그것을 깨닫고, 그 후에야 비로소 대중이 이해하기 시작한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예술, 문학, 철학에서 선구적 소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이해되었는데, 위의 에머슨의 말을 괴테식으로 해석한다면 "모든 개혁도 한때는 하나의 현명한 사람의 사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 현명한 사람의 하나의 사적인 의견이 다시 다른 누군가가 깨닫고 의견을 제시했을 때, 그 의견이 곧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가 되지 않을까?

125, 천재는 우연히 떠오른 생각에 골몰한다.


127,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고귀한 사람은 인격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인용된 말은 플루타르코스(Plutarchus, 46~120) <영웅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머슨이 자주 인용하는 “위대한 인물은 사소한 행동에서도 인격이 드러난다”는 말도 플루타르코스의 “나는 전쟁의 규모보다 작은 사건에서 더 잘 성격을 본다.”는 말과 유사하다.

따라서, 에머슨이 인용한 말은 "위대한 인물은 거대한 사건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이 사건을 통과하며 일관되게 드러났기 때문에 위대하다."라고 보아야 한다.


에머슨이 <자신감> 편에서 주장한 일종의 '주체성'은 역사 인식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진리가 내 안에 있듯이 역사도 내 안에 있고,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처럼 과거의 권위에 종속되지 말라고 하며, 스스로 사유하라고 했듯이 스스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초영혼(The Over-Soul)


140,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자 초영혼이며 (...) 혀끝으로가 아니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게 하고 (...)


156, 사람에게 모든 자연과 모든 사상이 자기의 마음에 계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라.

내면의 신성(divinity within)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초영혼> 편이 에머슨 사상의 중심을 이룬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의 자연관, 자기 신뢰, 도덕 철학은 모두 이 글의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서 있다고 한다. <초영혼>의 핵심은, 인간 각자의 영혼은 하나의 보편적 영적 실재와 연결되어 있으며, 진리와 도덕은 외부 권위가 아니라 그 보편적 영혼과의 직접적 직관적 합일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나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것 같다.



[감상평]


이 책은 최근 <자기 신뢰(Self-Relianc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내가 읽은 책은 2006년 번역 출간(이창기 역)된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2006.6.9에 일독 하였는데, 당시 내가 아무런 '작은 감상평' 조차 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억도 가물가물하여 금번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자신감(또는 자기신뢰)은 2002년 창업 당시 내 회사의 기업 이념 중 하나였으므로 일독을 한 것이었고, 최근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너세니얼 호손의 <주홍글자> 등을 읽으며 '초월주의자들'의 생각과 문학을 이어서 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서 서두에 '이 책에 실린 텍스트에 관하여'를 보니 에머슨의 <자신감>이란 독립된 책이 출판된 것이 아니라 그의 <제1수필집>(1841)과 <제2수필집>(1884)에서 7개의 소주제(1 수필집 : 역사, 자신감, 보상, 초영혼, 2 수필집 : 경험, 자연, 정치)를 선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신은 진짜 당신으로 살고 있는가?” 이것이 에머슨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에머슨이 말하는 자기신뢰란 흔히 말하는 자신감이나 자기합리화와는 다르다. 그것은 누군가의 인정으로 얻어지는 힘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믿는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나는 에머슨을 읽을 때, 마치 나 자신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때로는 마치 내 생각이 미리 쓰여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에머슨의 <자신감>이 평소 내가 생각했던 "나를 포함한 사람에 대한 신뢰"에 대해 보다 주체적인 입장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듯하여 감사하나 책 속의 모든 문장을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려웠다. 그가 철학서를 쓴 것이 아니라 에세이에 머무른 것이라고 양보하더라도, 무턱대고 에머슨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는 요즘의 상황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관련된 주장에 대한 다른 철학자의 의견을 참고해서 더 고민해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더 생각한 것들]


1. 에머슨은 칼라일을 만나면서 서로의 생애에 어떤 영향과 변화를 주었을까?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필가이자 역사가, 사회비평가이다. 나폴레옹을 포함한 11명의 영웅을 다룬 <영웅숭배론>으로 유명하다. 1833년 에머슨이 스코틀랜드 크레이겐퍼톡(Craigenputtock)에서 칼라일을 방문한 것이 출발점이다. 이후 평생 서신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형제”라 불렀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은 위대한 개인의 도덕적 힘을 강조했는데, 에머슨은 이 영향 아래서 위대한 인격을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는 시각을 강화했다고 알려진다.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지만 칼라일은 노예제 옹호, 에머슨은 노예지 반대 등 서로 정치적 견해는 달랐다고 한다.


2. 1837년 8월, 미국의 ‘지적 독립 선언문’이라 여겨지는 ‘아메리카의 학자(The American Scholar)’란 주제의 에머슨의 강연 내용은 무엇인가?

유럽 고전과 제도를 모방하는 대신, 미국의 자연과 사회 속에서 고유한 지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초월주의적 신념이 담겼다. 그는 학자가 단순한 지식 축적자가 아니라 인간 사유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 즉 “생각하는 인간(Man Thinking)”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사상은 개인의 직관과 창조적 정신을 중시하는 초월주의의 기초를 이루었다. <The American Scholar>는 미국 르네상스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트 휘트먼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국의 독립적 지성, 실천적 휴머니즘, 문학적 자기 확립의 이상을 상징하는 연설로 지금도 널리 인용된다.


3. 에머슨을 포함한 초월주의자들의 사상은 무엇이고 어떤 인물들이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나?

초월주의의 핵심은 "진리는 외부 권위나 교리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직관을 통해 직접 파악된다."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는 미국의 수필가·시인·철학자이자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의 대표 사상가다. 그는 저서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으로 개인의 양심, 단순한 삶, 그리고 자연과의 일체를 강조하며 현대 시민 저항과 환경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1841년 에머슨의 집으로 이사까지 왔고 1845년 월든 호수에 오두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

1840년 마가렛 풀러와 초월주의자 기관지인 <다이얼>을 창간한다. 마거릿 풀러(Margaret Fuller, 1810~1850)는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학 평론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초기 여성 권리 운동의 선구자였다. 뉴잉글랜드 초월주의 운동의 중심인물 중 하나로, 그녀의 저서 Woman in the Nineteenth Century는 미국 여성주의 사상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은 미국의 시인, 언론인, 수필가로, 시집 <Leaves of Grass(풀잎)> 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간 개별성,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노래하며 미국 문학의 근대적 목소리를 열었다. 자유시 형식과 포용적 인간관으로 19세기 이후 시의 방향을 바꾸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그의 시집 <Leaves of Grass(풀잎)>을 “미국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지혜와 재치의 작품”이라 칭찬했다.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은 초월주의 사상가들과 교류했으나,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탐구하는 점에서 초월주의의 낙관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4. 에머슨의 개인주의 경향성은 공동체의 책임이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 않을까?

에머슨은 “모방은 자살이다.”, “사회를 따르는 것은 자기 배반이다.”, “양심은 제도보다 우선한다.”라고 말하면서 공동체보다 개인을 절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직관을 절대화하면, 사회적 책임은 어떻게 유지되는지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에머슨은 공동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정부도 인간의 도덕적 정체성을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110p)의 말처럼 공동체는 무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성숙한 개인들이 만들어야 할 결과라는 것이다.


5. 에머슨의 '약한 호기심'과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에머슨은 개인주의의 찬양이라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중심을 ‘나’에게 두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약한 호기심’ 때문인데 이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곧 타인의 시선을 향한 심리적 의존이다.

또한, 에머슨이 “질투는 무지”라고 말한 것은 무지란 타인에 대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라고 말한다. 이 질투 다음은 모방인데, 그는 “모방은 자살”이라고까지 말한다. 타인의 삶을 복제하려는 순간, 나에게만 주어진 가능성은 실현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육체는 살아 있어도 존재의 핵심은 죽는다. 에머슨에게 모방은 영적 자아의 소멸이다.

라캉(Jacques Lacan)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좋아서가 아니라, 타자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물건이나 지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욕망해 주기를 욕망한다. 이 분석은 욕망의 구조 자체가 이미 사회적이며 타자 중심적임을 보여 준다.

에머슨이 말한 ‘약한 호기심’은 바로 이 상태, 즉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는 욕망의 형태와 같다. 나는 나로 살기보다, 남이 보는 나로 살고 싶어 한다. 이때 타인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나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 타자의 욕망은 인간 주체의 구조적 조건이다. 우리는 타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그 구조를 인식하는 것뿐이다. 반면 에머슨은 인간 내면에 외부의 시선을 넘어설 수 있는 중심, 즉 신성과 연결된 직관의 자리(“inner light”)가 있다고 믿는다. 자기 신뢰란 바로 그 내면의 중심을 기준으로 삼는 행위다.

이렇게 볼 때 『Self-Reliance』는 개인주의 찬가가 아니라, 존재의 주권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선언이다. 그리고 그 선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전히 타자의 욕망이 넘쳐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욕망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묻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6. 에머슨과 니체의 "노예 도덕"과 연계하여 생각해 본다면?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노예도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노예도덕이란 강자나 창조적 인간이 아니라, 타인의 힘에 반응하며 형성된 가치 체계를 뜻한다. 약자는 스스로 가치를 창조(Self-Creation) 하지 못하고, 강자를 원망하면서 그 반대되는 가치들을 ‘선’으로 선언한다. 겸손, 복종, 순종, 동정 같은 덕목은 이렇게 탄생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노예도덕의 인간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반응적 존재다. 그는 자기 기준에서 세계를 평가하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규정한다. 이는 에머슨이 말한 외부 기준에 예속된 인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언제나 타자의 욕망 좌표 안에서만 움직이는 주체다.

니체가 특히 비판한 것은 비교와 원한(ressentiment)이다. 비교는 자기 삶의 긍정이 아니라 타인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자기 평가를 낳고, 원한은 창조 대신 도덕적 비난을 낳는다. 이것은 곧 타인의 욕망을 중심으로 형성된 삶의 형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삶의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니체는 극소수의 인간, 즉 ‘자기 입법자’가 될 수 있는 강한 개인만이 기존 가치 체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보고, 에머슨은 보다 낙관적으로, 모든 인간 내면에 타인의 시선을 넘어설 수 있는 영적 중심이 있다고 믿으며, 라캉은 우리가 언제나 타자의 상징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아직까지는 라캉의 다소 비관주의적 생각을 따르고 싶지는 않다. 에머슨처럼 누구나 주체가 영적 중심에 있지는 않겠지만, 니체처럼 ‘자기 입법자’가 될 수 있는 강한 개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7. 에머슨의 사상과 스토아 철학과 비교한다면?

에머슨의 '자기 신뢰'와 스토아 철학의 '내적 통제'는 같은 산맥에 속하면서도 다른 봉우리를 향한다는 비유에 적합해 보인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우리에게 달린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라고 말한다. 즉 명예, 평판, 타인의 판단은 통제 불가능한 것(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이며 판단, 태도, 선택은 통제 가능한 것(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과 삶에 대한 태도의 측면에 볼 때 스토아철학이 조화와 수용을 강조하는 것에 반해 에머슨은 창조와 자기표현을 강조하는 점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에머슨은 스토아 철학을 이어받았지만, 스토아철학의 '수용'보다 다소 급진적인 “비순응자(nonconformist)”가 될 용기를 말하는 것이다.


8. 정의론을 철학사적 의미에서 정리한다면?

플라톤에게 정의는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서 “각자가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국가> 참조) 이것은 평등의 개념보다는 능력과 본성에 따른 위계적 질서가 정의의 조건으로 되어, 정의는 개인의 권리보다 전체의 조화를 우선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각자에게 그에 합당한 것을 주는 것(비례적 평등, proportional equality)”이다. 덕, 공적, 기여도가 분배의 기준이 되어 정의는 평등이 아니라 적합성(fitness)의 문제가 된다. 이 전통은 이후 능력주의적 정의관의 철학적 토대가 된다.

니체의 정의는 약자가 강자를 억제하기 위해 만든 도덕적 언어(허구)에 불과하다. '공정함'이나 '평등'은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힘의 관계를 은폐하는 가치 체계다.(<도덕의 계보> 참조)

존 롤스는 정의를 “공정성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고 규정한다. 그의 사고 실험, ‘무지의 베일’ 뒤에 선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태어날지 모른 채 사회 규칙을 선택한다.

그 결과 도출된 두 원칙 중 핵심은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다. 불평등은 허용되지만, 그것이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들에게 최대 이익이 될 때만 정당하다. 여기서 정의는 능력이나 덕이 아니라 우연한 조건 속에서도 공정한 출발선을 보장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마이클 샌델은 인간은 추상적 개인이 아니라, 전통과 공동체 속에 뿌리내린 존재이기 때문에 정의는 중립적 절차로만 결정될 수 없으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와 목적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능력주의가 성공을 도덕적 자격으로 오인하게 만들고, 실패를 개인의 결함처럼 느끼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정의는 단순한 분배 문제가 아니라 존엄성과 인정의 문제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을 읽고 더 세부적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관련 도서]


1. 소로우, <월든>

2. 너세니얼 호손, <주홍글자>

3. 자크 라캉, <욕망 이론>

4. 니체, <도덕의 계보>

5. 라이언 홀리데이, <스토아 수업>

6.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

7. 키르케고르, <철학적 단편> <불안의 개념>

8. 도스토예프스키, <죄와벌>

9. 플라톤, <국가>

10.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 니체, <도덕의 계보>

12. 존 롤스, <정의론>

13. 앤서니 스토, <고독의 위로>

14.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5. 칼라일, <영웅숭배론>



2026.2.5 ~ 2026.2.21, 중국 上海에서 읽고 한국 통탄에서 정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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