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전환시대의 논리>는 리영희 선생의 작품 중 내가 읽은 유일한 역작이다.
언젠가 들었을 법한 "내가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 애국이 아니라, 진실이야 진실"
한국 저널리스트 중 가장 존경받고 받아야만 하는 분. 그리고 그의 책.
진실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주장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는 이야기로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 1917~1985)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The Lost Honor Of Katharina Blum>를 읽는다.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는 그의 책 <청춘의 독서> 13장에서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라는 소제목으로 그 책의 독후감을 썼다.
1970년대 말까지 청년들의 마음을 뒤흔든 베스트셀러였던 전혜린의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66>이 있었는데, 전혜린은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953>를 번역(1964)한 번역가 이기도 했다. 지금 어느 중고서점에라도 있을 것을 기대하며 이 두 권의 에세이와 소설도 곁들여 읽어볼 동기도 생긴다.
이 이야기는 5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번역서로도 200쪽이 넘지 않는 비교적 짧은 글이다. (뵐의 대표작이자 노벨상 수상작인 <여인과 군상>은 거의 700쪽이다, 사지원 역, 2025 출판)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주변의 소개글에 의하면 단숨에 읽을 수 있고, 내용도 복잡하지 않아 쉽게 읽히는 책이라 하였지만, 나는 감히 속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쉽게 기억되지 않아 흐름이 자주 끊기기도 하지만 언론의 주장과 진실 사이의 판단을 계속 내리면서 나로 하여금 '부정의'에 대한 화를 돋우게 한다는 것이다. 2번 이상 읽어야 하는 또 다른 독자는 억울해할 필요가 없고 당연한 현상임을 주관적으로 밝힌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눈에 띈 것은 이야기 첫머리에 밝힌 저자의 의도였다.(이렇게 소설 등 책 본문이 들어가기 전에 밝히는 저작 의도 등을 전문적으로 무엇이라 지칭하는지 궁금하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
그런데 이 글이 발표된 실질적 계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의 내용과 매우 흡사해서 흥미롭다.
뵐은 지식인으로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당시 독일의 최대 출판 자본 악셀 슈프링어가 발행한 극우 일간지 '빌트, Bild'와의 논쟁이 그것이다.(상세 내용이 궁금하면 번역서의 작품 해설 참조)
몇 년 전 읽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이 불현듯 떠오른다.
《빌트》지가 절대 아니다라는 주장에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빌트》지를 계속 떠오르게 하는 '프레임'을 교묘하게 씌워버렸다.
또, 의도한 바 아니니 해당 일간지 당국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어쨌든 저자는 제대로 《빌트》지에게 시원하게 '복수'를 했다. 꼭 기억해 둘 만한 전술이다.
'카타리나(Katharina)'라는 여주인공의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봤음직한 이름. 그리스어로 '순수'라는 의미.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카타리나라는 이름을 사용한 대표적인 예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4세기 동정녀 순교자이자 14명의 구난성인 중 한 성녀(Saint Catherine of Alexandria)로 가톨릭·정교회·성공회에서 공경받는 성인이 있다. 특히 그녀의 상징물 중에 신비의 결혼반지가 있는데(아기 예수가 카타리나 성녀에게 끼위준 반지) 소설 속 카타리나가 지니고 있던 고가의 반지와 교묘히 중첩된다.
블룸(Blum)이란 성의 의미도 소설과 연관성이 있을까? 영어로 Bloom은 '꽃이 피다' 또는 그런 현상을 지닌 '꽃'이나 '전성기'를 의미한다. 소설 속의 블룸은 역설적이게도 '비열한' 《차이퉁》지 기자를 살해함으로써 지고 만다. 그러나, 그로 인해 독일 언론의 정의가 다시 피어나 번영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저자는 <후기>에서 카타리나 블룸을 '한참 번창하고 있는 사람'이라 설명하고 있다. 내 추측과 비슷한 증거를 찾아 흐뭇하다.
2019년 대전으로 이동하는 KTX를 기다리다 구매하여 읽은 야마구치 슈의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41장에는 '생각은 아웃소싱할 수 없다'라는 장 제목으로 '르네 데카르트(1596~1650)'를 소개한 것이 생각난다.
테카르트가 살았던 유럽 최대의 종교전쟁기인 30년 전쟁(1618~1648) 시기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어느 쪽이 진짜 '진리'인지를 두고 싸우던 시기. 그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그의 책 <방법서설>에서 밝혔다. 단순하게 말하면 '전부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것일 것이다. 야마구치의 표현을 다시 해석하면 "나의 이 생각의 다른 외부로부터 들어오지 못하게 주체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된다. 그런데 정말 이게 가능할까? 아니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라는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매사추세츠 대학 경영대학원 교수인 토머스 키다의 책 <생각의 오류, Don't believe everything you think>를 보면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심리적 오류를 지적하면서 결국은 '비판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런데 잠시 더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그런 한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런 오류를 만드는 정보가 외부로부터 계속 들어온다면? 그 외부가 진실이 아닌 정보를 계속 노출시킨다면? 이 측면에서 권위 있는 외부의 정보의 진실 여부의 문제로 귀결된 것이 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약간 주제를 벗어난 것 같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아주 느슨하게 연결된 파편의 연속이라 주장하는 닉 채터(Nick Chater)의 책 <생각한다는 착각, The Mind is Flat>도 이해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동성의 논문, <라캉의 구조주의 욕망이론, Lacan's desire theory in structuralism>을 찾아보니, 라캉이론의 핵심은 다음 세 가지라 한다. 첫째,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둘째,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셋째,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좀 더 포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권택영이 엮은 <자크 라캉, 욕망 이론>이란 책을 더 살펴봐야 하겠다.
진실을 라캉의 욕망이론에 빗대어 설명해 본다면 '인간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인 듯이 인간이 인식한 진실도 곧 타자기 진실이라고 한 것을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고 의심해 봐야 한다.
이를 언론과 관련된 측면에서 본다면 '주요 유력 언론사의 보도'와 '실재의 진실'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언론자유라는 아름다운 이름 뒤에서 고의적인 왜곡, 허위 보도로 보이는 사례가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사태 발생 후 약 1달 후인 2025년 1월 16일 온라인 모 매체는 '선관위에서 중국인 간첩 아흔아홉 명이 체포됐다'라는 기사를 실어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고, 많은 우익 동조자의 지지가 있었다. 결국 7개월이 지난 8월 13일, "거짓 제보에 따른 허위 사실 보도"라며 뒤늦게 사과함으로써 오보라는 것을 공식 인정했지만, 만일 대선에서 해당 매체가 원하는 후보가 승리했다면 당연히 진실은 가려졌을 것이다.
한국 영화 <내부자들, 2015>에도 의미 있는 장면이 나온다. 백윤식의 명대사 중 하나.
말은 권력이고 힘이야. 어떤 미친놈이 깡패가 한 말을 믿겠나?
카타리나가 사랑한 남자인 괴텐은 은행 강도에 살인 혐의로 언론과 경찰에 쫓기고 있었던 수배자였다.
하인리히 뵐은 이 책을 쓰기(1975년) 전인 1972년 이미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소설 <여인과 군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책 소개를 친절하게 도와주는 글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https://brunch.co.kr/@minsukab/337)
한림원이 밝힌 수상사유.
동시대를 두루 포괄하는 광범위한 시각과
인물의 성격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능숙함이
훌륭하게 조화된 글쓰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영화화한 감독인 폴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ondorff)에 의해 1975년에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으니 영화와 곁들어 보기에도 좋다. 2017년 한국에서도 하인리히 뵐(1917~1985)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듯이 연극이 공연된 적이 있었다. 앞으로 2년 뒤 110주년 기념 연극이 다시 공연된다면 꼭 관람하기로 한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
"그가 섹스나 한탕 하자고 해서, 나는 총으로 탕탕 쏴 주었습니다"
한탕과 탕탕. 후련하다. 원문도 이렇게 운율을 맞추었을까? 이렇게 저자는 저열한 언론을 향해 총을 탕탕 시원하게 날린다.
나는 저자의 의도대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소설이 아닌 '이야기'라 지칭했다. 저자가 10년 후 후기에서 밝혔듯이,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를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 후기의 주(註)를 보면,
'이야기'는 화자가 자신의 삶의 경험을 내용으로 삼고, 청자 역시 그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으로 가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산업과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널리 보급된 소설은 더 이상 타인으로부터 조언을 구하지 못하는 고립된 작가가 골방에서 쓴 고독한 개인의 이야기로서 타인과 그 경험을 나누지도, 타인에게 조언을 해 주지도 못한다고 벤야민은 설명한다.
한 문장 요약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The Lost Honor Of Katharina Blum>는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 1917~1985)이 1975년 발표한 소설로서, 당시 독일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언론의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고발한 사회 이야기이다.
p.s : 폴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ondorff)의 영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찾을 길이 없었다. 1971년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한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하고 톰 행크스와 메릴 스트립이 명연기를 펼치는 영화 ‘더 포스트(2017)’를 아쉬운 대로 감상한다.
2025.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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