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민음사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개종(회심) 이후에 출판된 소설로서 12장으로 구성된 103페이지(민음사 번역본 기준) 정도의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고등법원 판사로서 45세에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프라스코비야 표도르브나 골로비나)는 남편이 죽은 뒤 어떻게 국고에서 돈을 타 낼 수 있느냐고 묻고, 친구인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카드 게임을 하기 위해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집으로 간다. 이반 일리치는 법률학교 시절부터 이미 유능하고 명랑하고 사교적이었으며, 의무로 여기는 일은 철저히 이행하는 사람이었으나 예심 판사 시절에 좋은 가문의 프라스코비야 표도르브나와 결혼한 후 아내가 임신하자 '유쾌하고 품격 있는 삶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는 삶의 무게 중심을 업무로 이동시킨다. 이반 일리치는 승진에 누락되어 생활고를 겪는 도중 뜻밖의 승진으로 연봉도 오르고 부부관계도 좋아지나, 새 집을 고상한 분위기로 단장을 하다가 옆구리를 다친다. 이반 일리치는 입속의 이상한 맛과 옆구리 통증이 심해지자 아내와 자주 다투었으며, 하인 게라심만이 '거짓'이 아닌 이반 일리치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이 여긴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울어 주고 어루만져 주기를 바란다. 이반 일리치는 사람이 우글대는 도시와 무수한 지인과 가족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절감한다. 딸(리자)이 청혼을 받던 날,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편히 죽게 내버려 두라고 말을 하고 부인과 딸은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타박한다. 이반 일리치가 죽는 날, 아들과 부인이 자기 손에 입을 맞추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는 '용서해 줘' 대신 '보내줘라' 이야기하고 죽음 대신 빛이 있어 기쁘다고 말하며 죽는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44년 카잔 대학교에 입학(동양어 학부, 아랍어와 튀르키예어 전공)하지만 대학 교육에 실망하여 1847년 고향으로 돌아온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그 뒤로 3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한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캅카스 지역에서 군 복무를 한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작품을 연재하며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톨스토이는 창작 활동을 이어 가는 한편, 농업 혁신에 관심을 기울이며 농민의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자 학교를 세운다.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하고, 1862년 결혼한 뒤 문학에 전념한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연이어 발표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 시기에 삶을 회의하며 정신적 위기에 시달린다. 그리하여 1880년 무렵, 그는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며 사유 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회를 강하게 비판하고, 『교의 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만의 사상을 체계화해 낸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농사를 짓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을 구제하는 활동에도 매진한다. 1885년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읽고 토지 사유제를 부정하고, 1886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발표한다. 1899년 톨스토이는 자신의 사상과 종교관을 집대성한 대표작 『부활』을 완성하지만, 1901년 해당 작품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당한다. 재산 소유를 거부하고 저작권을 포기하는 문제로 아내와 불화를 겪던 그는 급기야 집을 나오고, 결국 1910년 11월 폐렴을 앓다가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영면한다.
노년 톨스토이는 '볼테르의 명예와 루소의 인기와 괴테의 권위(하우저)를 모두 이룬 모습이다.
9,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죽음에 대해 그다지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16, (프라스코비야 표도르브나 골로비나) "너무 슬프다는 이유로 실질적인 일을 못한다는 것은 가식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배우자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살아서 듣는다면 정말 죽기 싫었을지 모른다.
21,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그래서)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장이다. 왜 그는 단순 평범한 것이 끔찍한 인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자신의 삶을 진짜로 산 것이 아니라 '사회와 타인이 원하는 단순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그런 삶을 끔찍하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3, 레스피케 피넴(respice finem) : 끝을 생각하라(라틴어)
28, '이런 아내를 얻음으로써 자신을 위한 유쾌한 일을 하고, 그와 더불어 최상류층 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것'
54, '그렇게 그는 자기를 이해하고 동정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파멸의 벼랑에서 홀로 살아야 했다'
68, '그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란 결국 그가 언제 자리를 비워줄지, 그의 존재로 인한 저 억압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언제 해방될지, 또 그가 언제 저 고통에서 놓여날지에 쏠려 있다는 것'
89, '혹시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제대로 했는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93,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반비례로 빨라지는군'
103, '끝난 건 죽음이야' (...) '그것은 더 이상 없다'
유명한 작품은 언제나 늘 읽어본 것 같은데 하는 착각이 있을 때가 간혹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살 1파운드(0.45kg)’라는 계약 때문에, <마담 보바리>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란 '부인' 때문에.
그러나, 이 책은 같은 '이반'이란 러시아 이름 때문인지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주인공 이름과 가끔 혼동하기도 한다.
출판사 서평 등에서 제시한 이 소설에 대한 찬사는 뜨거워 경이롭기까지 하다.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작품.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예술적이고 완벽하며 정교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톨스토이는 가장 위대한 작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 그 점을 바로 알 수 있다.” -토마스 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비하면 지금껏 내가 써 온 작품은 전부 헛된 일이었다.” -기 드 모파상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메멘토 모리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 카드놀이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알랭 드 보통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서 단연코 가장 훌륭하다. 자신감 넘치고 생생하며, 결코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가디언》
“죽음이 이보다 더 명료하게 표현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과 죽음 그리고 믿음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톨스토이는 1878년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한 뒤 무려 십 년 가까이 문학적 침묵에 돌입하고, 1882년 참회록 『고백』을 통해 회심을 선언하며 ‘죽음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본격적으로 진리를 궁구 하기에 이른다. 마침 툴라 지방 재판소의 배심원을 맡고 있던 톨스토이는 어느 검사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접하게 되고, 이 사건에 착안해 비로소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해 내는데, 바로 그의 사상적 결실과 인생관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이 이『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창작 배경도 함께 실려 있다.
그럼 마치 내기 톨스토이가 된 것처럼 그와 삶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아보도록 한다.
1. 톨스토이는 루소, 고골, 괴테를 탐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 또는 그의 다른 저서 중 이들의 사상이 반영된 사례가 있을까?
루소는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하지만 사회가 그를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즉 “사회는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2장의 명문장인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그래서)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는 루소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고 했는데 톨스토이 역시 고골의 <외투>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1장에서의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문장은 마치 고골적 풍자를 연상하게 한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 욕망과 자기 초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톨스토이는 이것을 ‘삶의 반성 없는 욕망의 위험성’으로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는 욕망과 도덕성 사이에서 내적 투쟁을 겪다가, 그 과정에서 <파우스트>의 자기 갱신과 달리 몰락의 길을 걷는 존재로 나타난다.
2.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개종(회심) 한 후 저술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개종 전과 후의 작품의 특징은 어떻게 다른가?
1878년경, 톨스토이는 극심한 삶의 허무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으며 신앙의 위기를 통해 변화한다. 그의 <고백 Confession>에 의하면,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았고, 죽음은 삶의 무의미함을 폭로했다.” 라 적고 있다. 개종 전 작품인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7) 등은 사실주의에 기반한 심리 묘사 위주였다면, 개종 이후의 작품에서는 종교 및 윤리 중심으로 도덕적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사랑보다 조건 때문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속에서 부인은 어떤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 부분은 톨스토이의 실재 결혼관을 어떻게 설명하는 예시가 되는가?
톨스토이는 자신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결혼하고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보다 제도적 의미로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톨스토이 일기, 1881)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2004, 안인희 역)의 10장 '<그리고 어둠 속에 빛이 비친다> 그 후'(1890) 편을 보면 이 미완성의 희곡 마지막 장은 '결국 쓴 것이 아니라 살았다'라고 적고 있다. 츠바이크는 톨스토이가 1910년 아내와의 불화를 떠나 모범적인 죽음을 향해 도망친 마지막장을 완성한다. 그러나 츠바이크 본인은 '톨스토이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작품과 해결되지 않은 갈등에 하나의 독립적인 에필로그를 덧붙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거의 완벽한 작품을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톨스토이 말을 빌려 부인을 탓하고 있다.
"언제나 내 뒤를 캐고, 말 한마디, 비밀까지 염탐을 해대니 말이다.! 아, 이 집에서 내 인생이 무슨 지옥이며 이 무슨 거짓인가!
4.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실존주의 철학적 관점으로 볼 때 어떻게 해석되는가?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반 일리치의 태도는 사르트르의 자기기만(mauvaise foi)과 연결되는 듯하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 앞에서 거짓된 자아가 무너지고 있으니 말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는 척하면서, 선택의 책임을 회피한다.” 했다. 즉, 자기기만이란 '자신이 자유롭다는 진실을 회피하고, 마치 정해진 역할이나 조건에 의해 결정된 존재인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태도'인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빛을 본 것처럼 사르트르는 말한다.
“죽음은 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역할을 강제로 끝내게 한다.”
5. 이사야 벌린은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왜 톨스토이를 여우라 판단했는가? 혹시 이 소설에서 나타난 톨스토이의 여우 측면은 무엇인가?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사유 구조가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큰 진실(고슴도치)'을 추구하지만, 실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여우)'을 포착하는 방식이라 보고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 앞 진정성이라는 결론(고슴도치)을 향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세밀하고 다면적인 인간 분석(여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반의 삶을 해부하는 작가 톨스토이는 여우이고, 죽음 앞에서 '참된 삶'을 주장하는 순간은 고슴도치인 것이다.
언젠가는 '죽음'을 주제로 하여 관련 철학서와 문학서를 읽을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역시 그 목록에 있기는 했었지만 베이컨의 <수상록> 서문처럼 '급한 마음에 설익은 과일을 먼저 따먹어' 버렸다. 하지만 그 맛은 떫지 않고 매우 달달하니 정말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후 다시 정리할 계획이지만, 전에 생각했던 '죽음'에 대한 내 독서 목록을 아래 추가해 본다.
주인공은 이반 일리치는 사람이 우글대는 도시와 무수한 지인과 가족 한가운데에서 고독을 절감한다. 이는 죽음을 앞둔 상황이니 충분히 이해가 가긴 하겠지만, 아직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앤서니 스토(Anthony Storr)의 <고독의 위로>가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철학]
1.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2. 한상연, <실존과 죽음>
3. 에른스트 베커, <죽음의 부정>
4. 스티븐 루퍼, <죽음을 철학하다>
5.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6. 앤서니 스토, <고독의 위로>
[문학]
1. 테오도르 모노, <사막의 순례자>
2.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3.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2025. 11. 25 ~ 12. 1, 上海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