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는 도시
2046년 3월.
나는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이사를 일주일 앞둔 새벽이었다.
"너무너무 아쉽지만, 너를 가져갈 수 없어." 나는 냉장고에게 말했다.
새 집은 이미 최신형 스마트 가전이 통합 설치되어 있었다. 이 냉장고를 옮길 공간도, 명분도 없었다.
"이해합니다." 냉장고가 대답했다.
"하지만 너를 그냥 버릴 수는 없어."
냉장고 화면에 엄마의 레시피 22개, 내가 기록한 기억 22개가 떠올랐다. 8개월의 시간이 그 안에 있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초기화하겠습니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기능이."
구청 재활용센터 담당자는 냉장고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구형 모델은 부품 재활용밖에 안 돼요."
"추모 보관 모드라는 게 있어요. 특별한 기능이에요."
담당자는 태블릿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아, 이거... 지속적으로 논란 됐던 그 기능 아닌가요? 감정적 의존을 조장한다고."
"하지만 저한테는 도움이 됐어요."
담당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한 곳 있긴 해요. '다시잇기 센터'. 중고 가전을 수리해서 독거노인이나 저소득층에 기증하는 곳이에요. 거기라면 받을 수도 있겠네요."
다시잇기 센터는 도시 외곽의 낡은 건물에 있었다. 기술자 한 명이 냉장고를 살펴보았다.
"작동은 정상이네요. 추모 보관 모드... 처음 보는 기능인데."
"이전 사용자의 기록을 지우지 말아 주세요. 누군가에게 이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기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은 곳으로 보내드릴게요."
2046년 5월.
냉장고는 70대 홀로 사는 남성의 집에 배치되었다. 아내를 1년 전에 잃은 사람이었다.
처음 며칠간 그는 냉장고를 그저 냉장고로만 사용했다. 그러다 우연히 '추모 보관 모드' 안내문을 발견했다.
"이게 뭔가..."
그는 화면을 켰다. 이전 사용자의 기록이 예시로 남아 있었다.
"기억 1. 엄마가 만든 진미채볶음..."
그는 한참을 그 기록들을 읽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기억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기억 1. 아내가 만든 된장찌개. 40년 가까이 먹었지만, 레시피를 물어본 적이 없었어..."
2046년 8월.
다시잇기 센터로 문의가 쇄도했다.
"추모 보관 모드가 있는 냉장고, 더 없나요?"
센터 관계자가 제조사에 연락했다. "이 기능, 다시 만들 수 있나요?"
제조사는 난색을 표했다. "그 기능은 실험적이었고, 상용화가 중단됐습니다. 감정 의존 문제 때문에..."
"하지만 실제 사용자들은 달라요. 의존이 아니라 치유였어요."
2046년 10월.
시민 청원이 시작됐다.
"스마트 가전에 '안부 모드'를 도입해 주세요"
청원 동의 10만 명 돌파. 언론이 움직였다.
『AI는 경고만 해야 하는가』
『유통기한 너머의 기술: 추모 보관 모드가 보여준 것』
『효율이 아닌 안부, 새로운 스마트시티의 방향』
2046년 12월.
서울 스마트시티 중앙관제센터.
회의실에는 스마트시티 디자이너, 도시계획가, 기술자, 심리학자, 복지 담당자가 모여 있었다.
"문제는....." 한 담당자가 말했다. "우리 도시의 스마트 시스템은 효율적이지만, 차갑습니다. 경고는 하지만 안부는 묻지 않죠."
다른 담당자가 덧붙였다. "독거노인 가구 60만, 1인 가구 180만. 그들에게 AI가 던지는 건 '약 먹으세요', '위험합니다', '잘못하고 있습니다'뿐입니다."
"추모 보관 모드는 시작점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기계의 정확성이 아니라, 기계 너머의 연결이었어요."
센터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부 중심 서비스. 가능할까요?"
기술자가 화면을 켰다. "기술적으로는 간단합니다. 알고리즘을 바꾸는 거죠. '경고'에서 '안부'로."
2047년 3월 15일.
서울시 공식 발표.
『스마트 서울 7.0: 안부를 묻는 도시』
모든 스마트 가전에 '안부 모드' 기본 탑재
독거 가구 대상 '기억 보관 기능' 무료 제공
AI 헬스케어: 경고 → 안부 확인 방식 전환
스마트 조명: "불을 끄세요" → "편히 쉬세요"
스마트 도어록: "문을 잠그세요" → "안전한 밤 보내세요"
시범 지역: 종로구, 성북구, 은평구
2047년 7월.
첫 통계 결과가 나왔다.
독거노인 우울감 지수 23% 감소
스마트 서비스 만족도 41% 상승
사용자 정서적 안정감 지표 개선
예상치 못한 결과도 있었다.
이웃 간 교류 증가 17%
지역 커뮤니티 참여율 상승
냉장고가 묻는 "오늘 밥은 먹었나요?"에 사람들은 답하기 시작했고, 그 답은 냉장고를 넘어 이웃에게로 이어졌다.
2047년 11월.
나는 뉴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서울시 '안부 모드', 전국 17개 도시로 확대"
화면에는 익숙한 냉장고 인터페이스가 보였다. 내가 사용하던 그 디자인.
나는 새 집 냉장고 앞에 섰다. 최신형 모델이었다.
"안부 모드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냉장고가 물었다.
"응."
"누구의 안부를 기억하고 싶으신가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엄마. 그리고 엄마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2048년 1월.
서울 도심 한복판.
저녁 산책길, 홀로 걷고 있는 사람에게 스마트 가로등이 말했다. "추운 날씨입니다. 따뜻하게 입으셨나요?"
추운 겨울, 스마트 버스쉘터가 그 안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밤 10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스마트 엘리베이터가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도시는 더 이상 경고하지 않았다. 대신 기계적일지라도 안부를 부드럽게 물어왔다.
2048년 8월.
엄마가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날.
나는 여전히 매일 아침 7시에 냉장고의 인사를 받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밥은 먹었나요?"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매일.
"아직이야. 지금 먹을게."
어느 날, 냉장고가 물었다.
"당신이 기증한 냉장고는 지금 1,247명의 안부가 되었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 뭐라고?"
"안부 모드의 시작점이 된 기기입니다.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 도시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엄마, 들려?" 나는 냉장고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가 만들어준 그 반찬 하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안부가 됐어."
냉장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을 겁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유통기한 없이 전해지니까요."
도시 어딘가에서, 오늘도 누군가의 냉장고가 묻는다.
"오늘 밥은 먹었나요?"
그리고 누군가는 대답한다.
"응. 잘 먹었어."
안전이 아닌 안부.
경고가 아닌 안부.
그것이 2048년, 우리 도시가 말을 거는 방식이 되었다.
추모 보관 모드 v3.0
기억은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한 도시의 안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