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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May 23. 2023

실존주의라는 치트키

fleeting notes

옛 동료와 커피를 마시다 문득 실존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안개처럼 뿌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걱정 같은 이야기들이 나와서였다. 내심 '앞길 창창한 유능한 개발자가 왜 그런 걱정을..?' 싶었지만, 한편으론 대학 졸업반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경을 고쳐쓰며 그에게 얼마 전(사실은 꽤 오래전) 알게 된 실존주의를 얘기해주었다.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깊이 고민한 뒤 실존적 선택을 하세요. 그러면 된 것입니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말을 건네는 내 표정은 꽤나 진지했을 것이다. 그렇다. '치트키'를 쓴 것이다. 제 공공연한 비밀이 됐지만 '실존'이라는 단어는 어디에 붙든 말을 그럴싸하게 만든다.


장 폴 사르트르


"그 사람, 실존적 선택을 한 것 같군요." "실존이란 존재를 앞서죠.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저 지금, 실존의 위기를 느끼는 중입니다." 이런 식으로. 눈빛과 표정이 중요하다.


실존주의의 또다른 치트키적 면모는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삶을 강조한다는 데에서 나온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세상에 정해진 건 없으니 스스로 선택하라는 것. 어쩐지 벅차오른다. 주인된 삶이라니!


하지만 언뜻 대단해보이는 이런 말들은 잘 뜯어보면 무척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노예가 되고 싶은가? 아닐 것이다. 도구가 되고 싶은가? 아닐 것이다. 주체적 삶은 현대인의 상식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누우면 졸리다',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다' 따위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존주의가 벼락같이 인기를 모으다 시들해진 데에 분명 이런 이유가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당연한 얘기를 꽤 그럴싸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는 유용하다.


그럼에도 '실존'이라는 단어가 울림을 가지는 까닭은, 그 당연한 것들이 내 삶과 주변에서 곧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실존주의를 말해주며 그 당연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노력하지만 지켜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에게 해주었던 말이 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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