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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 May 31. 2020

(4)“그래서 야마가 뭔데?”

기사의 리드 문장을 찾아라

“야마가 이게 뭐야”“너는 야마도 제대로 못 잡냐”“(신문을 휙 집어던지며) 저리가!” 이럴 땐 부장의 얼굴 앞에서 빨리 사라져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럴 땐 유일한 친구, 담배나 피워야겠습니다. (중략) 선배들은 수시로 저에게 “야 야마도 제대로 못 잡아. 기사가 이게 뭐야”라며 욕을 해댔습니다.(2000년 3월27일, 미디어오늘)


20년 전 어느 기자가 ‘야마’를 주제로 쓴 기사 한 토막입니다. 그로부터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언론계 풍경은 그다지 바뀐 것이 없는 듯하네요. “그래서 야마가 뭔데?”“야마가 약한데?”“야마를 한번 틀어볼까”“이거, 야마 나올 거 같지 않냐”… 지금도 기자들은 야마란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야마?(‘야마 돈다’의 그 야마가 아닙니다) 기자가 아니라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할 것 같네요. 언론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은어, 야마 무엇일까요?


야마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본어 산(山), 혹은 톱의 날끝, 나사에서 온 것이란 얘기도 있고, 일제시대 문인들이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의 클라이맥스 언급할 때 쓰던 말에서 유래했단 말도 있죠. 한겨레신문 출신 박창섭이 쓴 <‘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2012) 설명을 빌리면 야마는 “기사의 주제, 핵심, 방향, 논조 등을 두루 포괄하는 용어”인데, 흔히 ‘날카롭게’ 혹은 ‘뾰족하게’ 같은 수식어와 어울려 쓰이곤 합니다.




야마가 중요한 이유는, 야마에 따라 기사가 말그대로 180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전인 지난해 1월 나온 기사들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매체가 같은 날 각각 5면과 6면 중국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대림동을 다뤘습니다.


<헤럴드경제> 2020년 1월29일자 5면(왼쪽)과 같은날 <한겨레신문> 6면


같은 현장, 비슷한 취재원(중국동포)을 인터뷰했음에도 기사 내용은 정반대였습니다.


우선 헤럴드경제는 중국인들의 낮은 위생관념에 주목했습니다. 기자가 직접 대림동에 가보니 마스크 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노상에서 음식을 팔고 있었으며, 심지어 바닥에 가래침을 뱉는 장면마저 포착됐다는 것입니다. 야마에 걸맞게 “코로나는 복불복”“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쓰고 어떻게 사냐” 등 감염증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발언들이 기사에 담겼습니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대림동에서 만난 중국동포들 입을 빌려 코로나19 이후의 ‘중국인 포비아’를 다뤘습니다. 온라인에 미확인 정보가 떠돌면서 ‘중국인 출입금지’를 내건 음식점이 등장했으며, 노동현장에서의 소외 등 편견과 혐오에 위축된 중국동포들이 더욱 위생에 신경쓰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앞선 헤럴드 기사와 달리, 한겨레 기사에 나온 중국동포는 “억울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고 수시로 매장을 청소한다”고 체념한 듯 말하고 있네요.


어떤가요? 야마의 차이가 확연히 보이시죠. 거칠게 정리하면 전자는 ‘코로나19 상황인데도 중국인 밀집지역 대림동은 역시나 비위생적이고 위험천만했다’, 후자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사회 중국동포들이 무차별 혐오와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2014년 1월15일자 30면


야마는 흔히 ‘기자에게 특정 주제, 정해진 방향대로 기사를 생산하도록 하는 일종의 오더’란 점에서 저널리즘의 ‘적’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기자들이 실체적 진실을 쫓는 것이 아니라 ‘OX 깃발’만 들고 있다는 것인데, 일부에선 이를 ‘야마주의’라 부르기도 합니다.


... 기사를 작성할 때 야마에 맞는 케이스는 살리고, 맞지 않는 케이스는 죽인다.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의제 설정이다. 매체의 시각을 선명하게 제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지면과 방송 분량도 한정돼 있다. 하지만 야마에만 집착하는 ‘야마주의’는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시킨다. 복잡하고 중층적인 현실을 하나의 틀에 끼워 맞추는 것 자체가 무리다.(OX 깃발만 드는 한국 언론[권석천의 시시각각])


실제로 데스크들은 종종 취재 기자들에게 “이렇게 한번 취재해보라”며 야마만 한 줄 툭 던져주곤 합니다. 그 근거는 대부분 ‘예전에 내가 취재해 봐서 아니까 한번 해봐라’죠. 그럴 때 기자들은 부당한 지시라고 여기기보단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언론계에서 말하는 ‘유능한 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데스크 입맛(야마)에 맞는 기사를, 뚝딱 만들어내는 기자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봤을때, 헤럴드, 한겨레 기사도 현장 기자가 눈으로 본 현실에서 귀납적으로 야마를 건져올린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 야마에 맞게끔 연역적으로 취재가 펼쳐졌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첨예한, 논쟁적인 사안인 경우엔 자기네 야마에 맞는 사실 조각만 갖다 쓰며 주장을 강화하는 ‘취사선택’이 이뤄지는 일이 많습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실체적 진실보다 야마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기자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어느 매체 기자들은 “우리 회사는 팩트 발굴보다 각(야마) 잘 세우는 기자를 더 높게 쳐주는 분위기”라며 자조하기도 합니다.


아래는 지난해 조국 전 법무장관 동생의 구속영장 기각 다음날 나온 기사입니다. 조선일보가 “구속영장 기각은 말도 안 된다. 법조계에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고 했면, 한겨레신문은 “구속영장 기각이 이례적이긴 하다. 그런데 일부에선 과잉수사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둘 모두 기각 사실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늬앙스, 즉 야마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물론 그 뒤에는 저마다의 야마를 뒷받침하는 ‘팩트’들이 촘촘히 렸습니다.

<조선일보> 2019년 10월10일자 3면
<한겨레신문> 2019년 10월10일자 5면




그렇다면 야마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야마는 보통 기사 헤드라인에 직설적으로 담깁니다. 하지만 문학적, 비유적 제목이 달리거나 지엽적인 팩트 하나만 부각해 제목을 뽑는 경우도  때문에 제목으론 야마를 정확하게 파악하 어렵습니다. 예컨대 아래 기사는 당시 돋보이는 헤드라인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제목봐서는 내용을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2019년 5월27일자 1면


야마는 대개 기사 도입부인 ‘리드’에 덩어리로 응축돼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기사의 첫 문장, 도입 문장을 뜻하는 리드(lead)를 곧바로 야마라 보기도 하지만, 야마와 리드는 쓰임새에서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야마가 기사 전체를 꿰뚫는 주제이자 관점, 목적이라면 리드는 그 야마를 한두 줄에 담은 기사의 말머리를 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면 사정으로 인해 기사가 한두 줄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거기에 들어 한두 줄을 리드라 보면 됩니. 이런 식의 기사쓰기는 AP통신이 미국 남북전쟁 때 전신(telegraph)으로 기사를 보내면서 일단 핵심 요지부 말하고, 뒤이어 세부적인 정보를 뉴스가치 순서대로 덧붙이던 데에서 유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그 전까진 소설처럼 만연체로 쓴 기사만 있었다고 하네요)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리드다. 리드 뒤에는 해당 사안을 구체적으로 뒷받침(설명)하는 '팩트'들이 순서대로 실린다.


리드에 야마 꾹꾹  있습니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데도 기자들은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리드 문장을 치고 깎고 갈고 다듬길 반복합니다. 는 기자들이 독자와  기자들, 심지어 기사를 고치는 데스크마저 자기가 쓴 기사를 끝까지, 정성들여 읽지 않는다는 점을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사의 간판격인 리드에 보다 공을 들이는 것이죠.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 탄핵이나 남북정상회담 같이 뉴스가치가 높은 사건수록 드에 힘이 들어기 마련입니다. 특히 뉴스가치가 큰 사안일수록 문학적(멋을 부린) 표현이 보이는(허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리드에 대해선 기자마다 호불호가 갈립니다.


다음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과 남북정상회담 이튿날 주요 일간지 1면에 실린 기사들의 리드 문장입니다. 매체별 기사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됐다.(국민의 이름으로 법치 세우다 <세계일보> 2017년 3월11일자 1면)
헌법재판소가 10일 박근혜 대통령 파면(罷免)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이날 오전 11시 대심판정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 사건' 선고 재판에서 재판관 8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박 대통령 탄핵을 인용(認容)했다. 현직 대통령이 파면된 것은 헌정(憲政) 사상 처음이다. 작년 12월 9일 국회가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결의해 헌재로 넘긴 지 91일 만에 대통령 탄핵 심판이 마무리됐다.(“박근혜 대통령 파면” <조선일보> 2017년 3월11일자 1면)
2017년 3월10일 오전 11시21분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됐다. 4년 전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화려하게 아버지 자리에 올랐던 박 대통령은 헌정사상 파면된 첫 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한국 사회는 지난해 가을부터 광장을 떠나지 않은 ‘촛불’로 상징되는 국민들이 진짜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낡은 대한민국’과 결별하게 됐다.(대한민국의 봄, 다시 시작이다 <한겨레신문> 2017년 3월11일자 1면)
대한민국 헌법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파면을 명했다. 69년 헌정 사상 초유의 일로, 박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 내려진 10일 오전 11시 21분부터 18대 대통령이 아닌 자연인 신분이 됐다. 2013년 2월 25일 취임한 뒤 약 4년 1개월, 1475일 만이다. 재직 중 탄핵 결정으로 퇴임한 만큼 박 전 대통령은 관련 법에 따라 경호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도 받을 수 없게 됐다.(박근혜 대통령 파면 <서울신문> 2017년 3월11일자 1면)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파면됐다. 70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법에 의한 대통령 강제 퇴진은 초유의 일이다. 진보, 보수세력은 “국민의 승리”, “아스팔트 위의 피”를 주장하는 등 희비가 엇갈렸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결정을 내린 헌법재판기관의 결론은 간명하다. 그 어느 누구도 법과 상식에서 예외적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위임을 받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법을 이길 수 없다.(다시 희망을 보다 <한국일보> 2017년 3월11일자 1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운은 뗐다 <조선일보> 2018년 4월28일자 1면)
남북 정상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비핵화의 빗장을 풀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은 65년간 얼어붙은 한반도 정전체제에 평화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MDL)을 넘나들며 보여준 담대함은 25년간 꼬인 핵 위기 해결의 물꼬를 텄다. 두 정상이 27일 만나 신뢰를 쌓은 12시간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역사적 대전환의 첫걸음을 내디딜 초석으로 충분했다. 문 대통령이 올 가을 평양을 답방하기로 한 것도 성과다.(“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첫 명문화” <한국일보> 2018년 4월28일자 1면)


보통 기사의 맨 첫 문장이 리드인 경우가 많지만, 독자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 사례가 있다면 아래 기사들처럼 사례 한두 개를 먼저 소개한 뒤 리드를 쓰기도 합니다.


<중앙일보> 2020년 6월1일자 10면
<국민일보> 2020년 5월27일자 16면


리드 찾기에 익숙해지면 기사를 빠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가령 국민일보 기사의 경우 제목과 리드만 슥 훑어도 ‘제주의료원 직원들의 직무태만으로 환자들이 위험에 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 결과 드러났다’는 기사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기자들이 매일 아침 20~30분 동안 10여개 신문을 훅훅, 그럼에도 깊이있게 읽어내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마가 지닌 정치적 성격과는 별개로, 기사 실무적인 측면에서 야마를 깎고 다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기사의 야마가 뾰족하고 선명할수록, 독자들이 사건과 관련한 방대한 정보를 보다 쉽게, 정확하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 때문입니다. 적어도 기자들은 그렇게 믿고 기사를 씁니다.


하도 훈련을 받다보니 기자들이 쓰는 글은 장르를  대야마가 뚜렷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어떤 글이든 주제 의식이 명확하죠. 래서 기자들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조금이라도 늘어진다 싶으면 아, 그래서 뭐라는 거야..며 답답해하곤 합니다.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죠. 그래서 야마가 뭐냐고요? ‘기사를 읽을 때는 항상 리드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야마를 읽 얘기입니다.


*<기자가 기사를 읽는 법>은 뉴스를 자주 보는 대학생, 혹은 언론계에 막 발을 디딘 수습기자들이 기사를 좀더 풍부하게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글입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일단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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