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송사에 휘말리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또 있을까요?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들은 법정 소송 말고도 언론중재위원회 분쟁 조정까지 걱정해야하는 처지죠. 이기면 그나마 본전이지만, 행여나 반론보도나 정정보도 결정이 나기라도 하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기자 스스로 자기가 쓴 기사가 ‘오보’였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기자들이 경찰이나 검찰 같은 수사기관 출입을 기피하는 것은, 그곳 특유의 피튀기는 경쟁 분위기나 업무 강도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분쟁에 시달리는 일이 비교적 많다는 점도 영향을 미칩니다. “너, 기사 쓰기만 해 봐! 각오해! 반드시 소송할 거야!” 으름장을 놓고 협박을 일삼는 취재원이 비일비재하죠. 소송 규모도 커서 억대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하는 기자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삶이 피폐해지기 마련입니다. 설령 취재 내용에 100% 확신이 있다하더라도 말이죠.
<한겨레신문> 2019년 9월2일자 3면
<국민일보> 2020년 5월21일자 6면
“OO일보 취재팀은 이러한 의혹과 관련해 A씨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에 종종 보이는 이 문장은 기자들에게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느낌이랄까요? ‘아, 기자가 소송 당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네. 민감한 기사인가 보구나.’ 마치 “봐 봐라, 우리는 충분히 반론권을 보장해주려 노력했으나 의혹 당사자가 응답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일단 기사를 쓰는 것이다. 나중에 딴 말 하지 말라”는 것처럼 읽힌달까요.
흔히 언론을 ‘권력’이라 부르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에겐 해당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이름 있는 매체들이야 사내 변호사가 이런저런 분쟁들을 척척 해결해주겠지만 90% 이상은 기자 본인이 해결해야 합니다. 각종 사건을 다루는 사회부 기자들이 쓴 기사일수록 기사가 틀에 박힌 듯 정형화, 규격화돼 있는 것도 이런 언론 환경의 영향이 큽니다.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분쟁을 피하는 노하우’에 따라 기계적으로, 테크니컬하게 기사를 쓰고 있는 것이죠.
“철저한 취재로 진실보도를 하면 되는 일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법원에서도 보도 내용이 ‘진실’일 경우엔 보도 당사자에 대한 반론권 보장이 다소 미흡하거나 명예훼손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기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언론의 공적기능을 전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죠.
최근 KT&G는 자사에 비판적 기사를 쓴 경향신문 기자 등에 정정보도 및 2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기자의 급여 절반을 가압류했다.
문제는 사건, 사고들에 담긴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사건 당사자 A와 B의 진술이 완전히 엇갈릴 때, 기자는 어느 쪽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여러 취재원에게 사실 관계를 교차 확인하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순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보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취재원의 기억이 오락가락한 경우나 피해자 진술 이외에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경우, 불순한 의도가 담긴 제보나 증거물이 조작된 경우 등이 꽤나 일상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강제수사 권한이 있는 경찰, 검찰 수사결과도 법원에서 뒤집히는 마당에 하물며 기자들의 취재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말하자면 기자의 ‘호신술’ 같은 것입니다. 전문 용어로 ‘상당성’을 확보해 두는 작업의 흔적입니다. 여기서 상당성이란 ‘진실한 사실이란 증명이 없더라도 기자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를 뜻합니다. 즉 ‘기자 입장에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증거를 모아두는 것입니다. 상당성이 인정되면 설령 오보였다고 해도 법원에서 ‘면피’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호신술
기자들이 의혹 당사자나 그의 지인들에게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을 ‘뻔히’ 아는 데도 수십통의 부재중 전화를 남겨놓거나 수십통의 메일을 주기적으로 보내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실상 “자, 봐 봐라. 나는 이만큼 노력했다”는 주장인 셈이죠. 이는 오보의 가능성을 늘 열어두는 기자들의 습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법원에 갔을 때를 상상하면서 움직일 수 없는 취재의 근거를 마련해 두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송까지 염두에 두는 기자들은 접촉시도 기록과 통화녹음, 기사 발제안, 취재메모 등을 꼼꼼히 정리해 두는 것이 보통입니다.
더 조심성이 강한 기자들은 문장의 술어를 오로지 ‘했다’만 쓰기도 합니다.
기자들은 기사를 쓸 때 가급적이면 동어반복을 피하려 합니다. 버릇 같은 것이죠. 이를테면 ‘말했다’를 한 번 쓰면 그 다음 문장은 ‘강조했다’로, 그 다음엔 ‘언급했다’, 그 다음엔 ‘털어놨다’ 같이 쓰는 겁니다. 문장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글맛과 늬앙스를 살리려는 취지입니다.
<동아일보> 2020년 5월11일자 6면
그렇기에 술어를 ‘말했다’ 혹은 ‘했다’만 반복해서 쓴다는 것은취재 당사자에게 ‘일말의 트집거리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늬앙스가 담긴 단어를 썼다”는 식으로 돌아올 반격을 미연에 방지하는 느낌이랄까요?
이밖에도 ‘알려졌다’만 연거푸 나오거나 ‘∼라고 볼 여지가 있다.’, ‘∼가능성도 점쳐진다.’, ‘∼하기도 한다.’ 같은 추측성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법원은 이런 표현들을 ‘의견표명’ 내지는 ‘논평’으로 판단해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
<조선일보> 2019년 12월23일자 8면
“~연락이 닿지 않았다.”는 표현을 쓰는 데에는 취재 당사자가 의혹을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효과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정정당당한 취재임에도 본인이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피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는 늬앙스랄까요.
이를 무심코 읽는 독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높겠죠.기자의 취재에 무조건 응해야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또 ‘우리는 이만큼 정통으로 취재하고 있다’는 취재의 충실도를 외부에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즉, 여러가지 기능과 의도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문장인 셈입니다.
흥미로운 대목은 기자들이 이렇게까지 오보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의외로 반론권 보장에 소홀하다는 점입니다. 언론중재위원회 조정 사례들을 보면 기자가 취재 당사자에게 아예 연락을 시도하지 않은 경우도 꽤 많습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도 당사자가 정말 꼭꼭 숨어버려 찾기 어렵다거나 기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일 경우, 혹은 기자가 자기 취재에 너무나 확신을 가져 당사자 입장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우 등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다른 매체보다 기사를 빨리 쓰려는 욕심, 그러니까 십중팔구는 ‘단독’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단독은 기자 사회에서 일종의 저작권 같은 것입니다.대개 취재의 모든 공은 최초 보도한 한 명의 기자에게 돌아가고, 이는 '일단 내고보자'는 심리를 부추깁니다. 기자들도 사람인지라 단독 욕심을 떨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선일보> 2019년 5월13일자 14면
“너 기자 맞냐? 어떻게 기자가 아이폰을 쓰냐?!”
기자들끼리 하는 우스갯소리입니다. 아이폰에는통화녹음 기능이 따로 없기에,‘너 그러다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뜻에서 하는 농담이죠. 얼마 전 아이폰을 쓰는 기자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은 왜일까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낮은 연차 기자들이 점점 더 위험하고 예민한 취재를 꺼리고 안전한 기사만 쓰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해석일까요.
아무튼 통화녹음 등을 소홀히 했다가 큰 코 다치는 기자가 언론계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말하자면 호신(護身)에 실패한 것이죠.
*<기자가 기사를 읽는 법>은 후배들, 그러니까 뉴스를 자주 보는 대학생, 혹은 언론계에 막 발을 디딘 수습기자들이 기사를 좀더 풍부하게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글입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일단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