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한국일보는 <독자 여러분께 알립니다>라는 기사를 통해 앞서 “한국산 진단키트가 부적절하다”는 미국 하원의원 의회 발언을 기사화한 데 대한 유감을 표했습니다. 전후 맥락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보도해 독자들에게 혼란을 줬다는 취지입니다.
여기서 정작 기자들 눈길을 끈 것은, 기사의 정치적 성격보다 엉뚱한 과학 기자 ‘바이-라인(By Line)’이 기사에 들어갔다는 점이었습니다.
“…기사 수정 과정에서 주된 작성자가 아닌 기자는 기사의 바이라인에서 빠졌으며, 해당 기자는 기사가 작성되는지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바이라인은 기사를 집필한, 법적·도의적 책임을 지는 기자를 가리킵니다. 기자들 반응은 이랬습니다. “어휴, 또 어느 데스크가 애먼 기자 하나 잡았나 보구만….”
실제로 해당 기자는 SNS를 통해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기사가 나가는지도, 나갔는지도 전혀 알지 못했고, 관련 업체 항의를 받고서야 기사가 나간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중략) 그런데 저 기사가 제 바이라인으로 나간 뒤 저는 진단의 기본도 모르는 ‘기레기’ 기자가 돼 버렸고, SNS상에서 난도질 당했습니다.”
해당 보도 이후 한국일보 기자가 쓴 SNS 글
기자가 아니라면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자들에겐 꽤나 익숙한 풍경입니다. 자기가 쓰지 않았는데 기사에 바이라인이 실리거나, 혹은 자기가 썼는데도 바이라인이 빠지는 상황은 언론계에서 퍽 일상적으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이라인에는 다양한 맥락이 숨겨져 있지만, 결국 핵심은 ‘책임’에 있습니다.
기사에 대한 책임은 분산돼 있습니다. 기사를 발제·취재·집필한 취재기자, 지휘·승인·데스킹하는 팀장과 데스크, 제목을 다는 편집기자, 모든 기사의 최종 책임자인 편집국장 등이 조금씩 책임을 분담합니다. '원론적으로' 그렇단 얘깁니다. 현실은 다릅니다. 기사를 직접 쓴 취재기자, 그러니까 바이라인이 들어간 취재기자가 기사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서의 소명은 늘 취재기자의 몫입니다.
바이라인이 여럿이어도 책임은 동등하지 않습니다. 기사를 처음 발제한 기자가 주된 취재와 집필을 맡으며, 다른 기자들은 이를 거드는 수준에서 기사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바이라인 뒤 이메일 주소로 알 수 있는데, 이 이메일의 주인을 사실상 기사의 주인, ‘총책임자’라고 보면 됩니다.
<한겨레신문> 2016년 9월26일자 1면.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 시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취재를 사실상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매체들은 입사한 지 3~6개월 미만 수습기자는 바이라인을 달아주지 않습니다. ‘기사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존재’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설령 넣더라도 바이라인이 하나만 들어가는 ‘단독바이’는 보호 차원에서 되도록 피하기 마련입니다.(최근에는 ‘수습기자’ 바이라인도 종종 보이나 이마저 ‘단독’을 물어왔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즉, 단독바이가 들어갔다는 것은 ‘최소 1인분은 하는 기자’란 뜻인 셈입니다.
<세계일보> 2019년 3월7일자 10면
바이라인은 순서가 은근히 중요합니다. 통상 기사에 공헌한 순서대로 이름이 실리기 때문입니다. 불과 수년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매체가 무조건 기자들의 입사연도순, 그러니까 서열순으로 바이라인을 달았습니다. 후배 기자 입장에선 아무래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이제는 꽤 많은 매체들이 기여도순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일부 매체는 여전히 서열순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 2019년 5월23일자 노보 1면
때때로 ‘모찌(기삿거리, 제보를 뜻하는 언론계 은어)’를 물어온 기자나, 실제 기사를 집필한 기자의 바이라인이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나와바리(출입처)’ 문제입니다. 출입처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한국 언론계에선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일단은 나와바리 기자의 바이라인이 최우선적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특수한 상황이라 함은, 모찌의 뉴스가치가 대단히 높아 바이라인을 뺐다가는 기자끼리 오해나 갈등이 생길 수 있는 경우나, 추후 법적 다툼이 생길 여지가 있는 경우 등을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바이라인을 나와바리 기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일종의 ‘미덕’쯤으로 여겨집니다.
야간 기사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자도 사람인지라 퇴근 이후엔 휴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늦은 저녁에 나온 타사 단독기사(대개 방송기사)를 받아야할 경우, 당직자가 기사를 쓰되 바이라인은 나와바리 기자의 것을 넣곤 합니다. 이럴 때 당직자는 해당 기자에게 “이런 기사가 나왔는데 별 문제 없으면 내가 쓰고, 네 바이를 넣겠다”고 알립니다. ‘편히 쉬되 알아는 두라’는 취지죠. 물론 기사에 예민한 내용이 담겨 있거나, 추가적인 확인이 꼭 필요한 경우엔 나와바리 기자가 직접 씁니다.
<조선일보> 2019년 4월17일자 4면
두 번째는 취재원 보호입니다. 수사기관이나 공공기관은 물론, 사기업에서 벌어지는 ‘취재원 색출’은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며, 대단히 끈질깁니다. 기자의 고향이나 초·중·고·대학교, 과거 인터뷰 등을 토대로 신상과 이력을 샅샅이 털고, 이와 조금이라도 겹치는 이들을 수사선상에 올려 하나하나 색출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이 정도이다보니, 다른 기자와 얘기해 바이라인을 바꿔 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만 이 경우엔 기사로 인한 법적 분쟁이나 논공행상을 따질 때 잡음이 생길 여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은 기자 보호 목적입니다. 지난해와 올해 각각 ‘N번방’ 실태를 집중보도한 한겨레신문과 국민일보는 기사 바이라인에 ‘특별취재팀’만 넣었습니다. 직접적인 테러 경고가 있었던 만큼 기자가 특정되지 않도록 일부러 이름들을 뺀 것이죠.(그럼에도 신상털기 등 사이버테러가 가해졌습니다) 지난해 자사 주식을 대량 매입한 호반건설과 한바탕 붙은 서울신문 기자들이 ‘특별취재팀’ 바이라인으로 호반건설 비리 의혹 등을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겨레> 2019년 11월28일자 9면. 테러 위협 등으로 인해 기자들이 개인 바이라인을 넣지 않았으며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을 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기사의 내용과 분량에 비해 바이라인이 너무 많을 때 일부가 빠지기도 합니다. 대단한 특종이 아닌, 3∼5매짜리 기사인데 바이라인이 3개, 4개씩 달려있으면 기자들 눈에는 다소 어색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죠. 기사의 분량은 대체로 뉴스가치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름이 빠질 땐 기자들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포털 사이트로 기사를 볼 때 종종 바이라인이 있어야할 곳에 기자 이름이 없고 ‘인터넷 뉴스팀’ ‘디지털 뉴스팀’ ‘온라인팀’ ‘뉴스팀’만 쓰여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들은 정식 기자 교육을 받지 못한 ‘알바생’이나 온라인 기자들이 실시간 대응 목적으로 쓰는 것들입니다. 기사로 인한 책임을 개별 기자(알바생)가 아닌, 팀(회사)에서 지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확인’이라는 기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부과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이 기사들은 가만 살펴보면 취재원이 다른 매체 혹은 ‘업계발’로 애매하게 뭉뚱그려져 있거나, 문장의 술어가 대부분 ‘알려졌다’나 ‘전해졌다’뿐입니다. 기자들은 이런 바이라인을 보면 곧바로 ‘뒤로 가기’를 누르곤 합니다. 얻을 게 별로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기사라기보단 차라리 블로그, SNS 글에 가깝다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 거칠게 말해, 자기 기사에 책임도 못지는 기자가 쓴 것이 어떻게 ‘기사’냐는 것입니다.
*<기자가 기사를 읽는 법>은 후배들, 그러니까 뉴스를 자주 보는 대학생, 혹은 언론계에 막 발을 디딘 수습기자들이 기사를 좀더 풍부하게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는 글입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일단 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