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일기
신격호. 이름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였다. 수습기자 생활 중 손에 닿는 하나하나 신기하지 않았던 것이 없지만, 이번엔 더욱 그랬다. 신문과 TV에서만 보던 그를 만나는 것은 사뭇 색다른 일이었다. 내가 경영학을 전공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 회장과 롯데는 우리 경제를 이끌어 온 거대한 톱니바퀴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는 거인이었고, 내겐 저 높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존재였다.
롯데그룹 신 총괄회장은 여동생의 피성년후견인 신청에 따라 3일 오후 서울가정법원에 출두했다. 스케치를 하러 양재동으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지하 4층 주차장에 기자들이 바글바글했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카메라가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신 회장보다 그들의 행동거지가 더 관심이 갔다. 힐끗힐끗 곁눈질한 그들은 단정해 보였다. 청바지에 헤진 잠바를 입고 머리가 삐죽 뻗쳐있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누가봐도 기자답지 않은 몰골을 한 탓(나만 그런 건 아니다!)에 이곳저곳 경비원들과 종종 실랑이를 벌이곤 했는데, 그들은 항상 기자증을 보여주어야 길을 터주곤 했다.
좌우지간 그들은 기자같아 보였다. 잘 빗은 가르마 머리와 딱 떨어지는 정장. 검정구두는 유난히 반짝거려 보였다. 숨을 크게 들여마시고 눈을 크게 떴다. 수습인 나에게 뭔가를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후 3시40분쯤 신 회장을 태운 에쿠스 차량이 도착했다. 혹시나 나만 현장에서 중요한 걸 놓칠까 조마조마했다. 등으로 긴장감이 스몄다. 손발에 땀이 찼다. 그러나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차에서 내린 신 회장이 여러 경호원과 수행원을 곁에 두고 모습을 드러낸 현장은, 그야말로 소문난 잔치였다. 먹을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신 회장도 그랬고 멋드러진 기자들도 그랬다.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걷는 그는 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상속분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재판 내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유 모를 인상을 쓴 채(대부분 무척 화가 나 보였다) 떠밀려 다니는 기자들도 그리 빛나 보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 거기 있던 기자들은 왜인지 모두 '우르르' '우르르' 몰려다니기만 했다. 그리고 짜기라도 한 듯 각자 핸드폰을 꺼냈고 경쟁이라도 하듯 누군가의 뒤통수를 열심히 찍었다.
서커스 북소리가 나면 일단 쫓아가고 보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던가. 한시간여 비공개 재판이 끝나고 5층에서 한 법원 직원이 “신 회장이 이미 다른 통로로 내려갔다”고 말하자 주차장으로 허겁지겁 뛰어내려가는 기자들을 보니 기자 역시 그 범주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였다. 신 회장 일행은 한참 뒤에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심스레 내려왔고, 유유자적 자리를 떠났다. 그 과정에는 날카로운 질문도, 속 시원한 대답도 없었다. 거인도 없었고 본보기도 없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오랜 진리만, 있었다.
20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