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알게 모르게 형들이 많다. 인터넷에는 많은 형들이 떠돌아다닌다. '○○형' 착착 감기는 어감 때문인지 몰라도 일면식 하나 없는 그들을 우리는 형이라 부른다. '흑형'이니 '백형'이니 인종을 가리지도 않는다. 물론 나이도 상관없다. 왠지 모르게 형이라 부르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거기에는 친근감, 존경심, 조롱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유명한 형님들이 계신다. 예전엔 한양대하면 찬호형, 몽구형이었는데, 요즘엔 무성이형이 대세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안 보이시는 데가 없다. "무성이형" 아주 그냥 입에 착착 감긴다. 아마 김무성 대표께서도 철없는 후배들의 농담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그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형님 정치' 아니던가.
내가 보기에 동문의 자랑, 무성이형은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그것도 심각한 위기다. 글쎄, "너 따위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딱히 없다. 그런 '우주의 기운'이 보인 달까. 그래도 굳이 구체적으로 적자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국정교과서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국정교과서는 청와대의 꽃놀이패처럼 보인다. 바둑에서 말하는 꽃놀이패는 본인은 져도 잃을 것이 없는데, 상대는 지면 큰 손실을 입는 일방적인 수를 말한다. 청와대가 국정화를 이토록 강경하게 밀고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잘되면 보수층을 결집해 내년 총선의 정치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의 숙원이었던 '올바른 역사'까지 달성한다면 금상첨화다. 역풍이 불어도 잃을 것은 적다. 무엇보다 눈엣가시 같았던 비박 수뇌부를 숙청할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묘수다. 또 국정화는 그동안 당청관계에서 껄끄러웠던 공천제도 이슈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꽃도 보고 뽕도 따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성이형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은 총선 승리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또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주에는 캐나다 총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더니, 어제는 폴란드가 정권을 교체했다. 영국에서는 '골수 좌파' 제레미 코빈이 오로지 민중의 지지를 받아 일어섰고,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 열풍이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기존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균열이 시작됐다고 본다면 섣부른 판단일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치 지형이 범지구적으로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 '권좌'를 봤다면, 무성이형에게 남은 수는 전략적 구분짓기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정화 지지는 악수(惡手)다. 이번 기회에 당대표로서 뚝심을 보였어야 했다. '형님 정치'의 핵심이 바로 그것 아니던가. 대중의 공감을 얻을 소신과 뚝심 있는 모습이 필요했다. 기존 권력에 대한 소신 있는 태도, 정면승부만이 체급을 올릴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납작 엎드렸다. "역사를 잘못 배워서 청년들이 자살하는 것"이라는 선언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이제 사람들은 당과 청와대를 동일시할 것이다. 행정부에 대한 분노의 칼날이 당에 겨눠지고 있다. 그 칼날을 어찌 피할 셈인가. 정녕 그들에게는 '헬조선'의 절규와 신음소리들이 닿지 않는다는 말인가.
총선 전 쓸 만한 카드는 별로 없어 보인다. 미중일 국제관계 카드는 큰 자극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개혁카드들도 이미 뽑을 대로 뽑았다. 경제라고 다를까. "경제만 보겠다"던 장관이 총선출마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 건 북한인데, 이산가족 상봉이 엊그제다. 북한 수뇌부가 총 맞지 않는 이상 도발이 또 일어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글쎄, 최후의 패로 정치 스캔들이 등장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정기관이 변수다. 물론, 엎드린 이유가 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그(들)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사회에서 형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형'의 이미지는 늘 따뜻하고 다정하다.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매질로 눈물지을 때 묵묵히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때로는 나를 대신해 불같이 목소리를 내는 듬직함이 바로 우리가 그리는 형의 모습 아닐까. 대중이 '무성이형'에게 바라는 리더십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래서 자꾸만 아버지를 닮아가는 형이 동생들은 두렵기만 하다. 20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