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행한 '소확행'이란 단어를 보면 조금 복잡한 감정이 든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을 뒤집어 보면 "이제 크고 불확실한 행복은 그만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행복론들을 들여다보면 핵심은 자기 가치관을 바꾸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거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것처럼 마음먹기에 따라 힘든 일상에서도, 사소한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옳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조언'들을 볼 때면 어쩐지 불편한 감정이 든다. 불행의 이유를 모조리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네가 불행한 것은 네가 그렇게 마음을 바꿔먹지 못했기 때문이야"랄까. 물질과 성공에 대한 큰 욕심을 버리고 일상과 주변에서 작은 행복을 찾아 만족하라는 얘기들은, 어쩐지 목가적 분위기마저 풍긴다.
사실 말이 쉽지,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속세의 인연을 모조리 끊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 스님들도 죽을 때까지 욕심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은 화두라고 한다. 무수한 자극에 시시각각 노출되는 현대인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 석가모니마저 보리수 아래 앉아 6년 넘게 수행한 끝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하물며 우리 같은 일반인이야.
'행복론'은 구조의 부조리를 은폐하고, 불행의 책임을 은연중(혹은 대놓고) 개인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꽤 닮아있다. 불평등을 내재화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개인을 만들어낸다. 나도 한때 소확행을 추구한 적이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과 사람에 너무 지쳐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거의 놓아버렸을 때였다. 당연하게도 마음을 한순간에 바꾸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리 행복하지도 않았다. 202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