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정치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한 데에는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해 말 예정된 대선, 그러니까 난생 처음 겪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 스스로의 정치성향에 문득 의문이 들어서였다.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정치성향을 물었고, 선뜻 답을 못해 내심 부끄럽게 생각한 기억이 난다. 그러고 얼마 뒤 정치학과에 무작정 찾아가 원서를 썼던 것 같다.
나는 좌파일까, 우파일까. 부끄럽게도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자본주의의 첨병격인 경영학을 전공했다 보니 아무래도 우파 성향, 그러니까 소유권과 자유경쟁의 질서, 국제화 같은 것을 중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소수자나 약자, 불평등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조정 같은 좌파적 가치를 우선시 한다. 늘 오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그리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으려는 태도를 보면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도, 국가나 조직이 만든 질서에 저항감을 갖고 변화를 적극 긍정하는 태도를 보면 진보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가운데 어디쯤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고 내가 중도주의자라는 건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중용 혹은 중도 같은 용어는 대체로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추켜세워지지만, 실상 기회주의적인 태도나 위선, 눈치보기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쪽도 나쁘고 저쪽도 나쁘다 하면 결과적으로 '이런 비판적인 태도만 옳다'만 남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손해보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위신과 자존감을 손쉽게 지킬 수 있는 정치적 스탠스인 셈이다. 어쩐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경쟁과 기업가정신의 중요성을 알고, 국가차원에서 대기업 중심의 글로벌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최대한 존중하되 이를 해치지 않는한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말한다. 물론 대개의 경우 "대충 미국식 리버럴에 가까운 것 같다"고 얼버무린다.
그렇다면 '대충 미국식 리버럴'은 우리사회 어디쯤 있는 것일까. 책도 꺼내보고, 고민도 좀 해봤는데 여전히 모르겠다. 좌파가 우파처럼, 보수가 진보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이라 그런가, 더 모르겠다. 그래서 자기가 좌파다, 우파다 하는, 혹은 '무슨무슨 주의자'라고 자신있게 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어떤 면에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아무래도 나만 공부를 헛한 것 같다. 계속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는 것만 잘 알겠다. 202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