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근처에서 영화를 한편 보고 나오는 길에 꽃집에서 진열해 놓은 보라색 스타티스 꽃이 보인다. 그 앞에 잠시 서서 가만히 꽃을 바라본다. 문득 내 고양이가 보고 싶어지고 발길을 재촉한다.
나의 고양이는 나에게 보라색 스타티스 꽃이다. 흔히 러시안블루 종은 눈은 초록색이고 블루빛이 도는 회색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녀석은 눈도 초록색이 아니고 레몬 같은 노란색인 것을 보니 딱히 러시안블루의 순수 혈통은 아닌 것 같다.
처음 데려왔을 때는 나도 '품종'에 집착하여 아기 때는 눈이 노란빛이다가 성묘가 되면서 초록색으로 변한다는 말에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초록색 눈으로 변하지 않았다. 왕년에 컬러리스트 자격증까지 땄던 사람으로서 아무리 보아도 털빛에서 블루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유 없이 보라색 스타티스를 볼 때마다 그 녀석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와 며칠만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털 색깔로는 절대 고양이의 성격도 개성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각자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걸. 그리고 사실 녀석들은 무지개 빛에 가까운 다양한 사랑스러운 면을 보여 준다는 것을.
-작은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멀찍이 앉아 나를 하염없이 바라볼 때.
-조그마한 송곳니로 사료를 오도독 깨물 때.
-퇴근하고 현관을 열면 두 앞발을 모으고 깡총 뛰어 나의 다리에 머리를 비빌 때.
-하염없이 창밖을 보면서 이름을 부르면 못 들은 체하지만 작은 귀가 살며시 돌아 내쪽을 향할 때.
-침대에서 내 머리냄새를 맡으며 그르렁대며 나를 넘어 다닐 때.
-자다가 일어나 보면 내 팔을 배에 깔고 자고 있을 때.
-고양이 마약 간식을 날름날름 먹을 때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며 무아지경에 빠질 때.
-한껏 비싼 하우스를 사주면 상자에 들어가서 앉아 있을 때 등등.
사랑스러움의 결정체 같은 모습에 처음 고양이를 데려온 몇 달은 매일 두근두근했고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설레었다. 이 녀석만 바라보고 있어도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물론 피곤한 것도 있었다. 녀석 때문에 작은 비닐이란 비닐은 철저하게 주워 담았고 온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녀석이 발바닥부터 온몸을 그루밍하는 바람에 먼지라도 먹을까 염려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다지 유난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무언가 정체되어 있는 것만 같은 시기였다. 나만 뒤쳐진 것 같기도 하고 모두가 한 단계 나아가는데 나는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은 시기였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회의가 들기도 하고, 그때 왜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후회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고민 끝에도 녀석을 보면서 웃게 되었다.
직장은 전쟁터였다. 새로 바꾼 직장에서 기존 멤버들의 마음에 들어야 했고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성실하고 예의 바르며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프로라고 검증받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나만 실수해도 혹은 무심코 말을 뱉고 나서도 '내가 왜 생각을 더 하지 못하고 섣불리 그랬을까' 라던가 '그 말을 왜 했지. 나를 오해하면 어쩌지'라던가 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는데 그럴 때 녀석이 떠오르면 슬그머니 불안함이 가라앉았다.
녀석은 마치 뽀얀 수증기를 뿜으며 끓고 있는 작은 주전자 같았다. 녀석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보글보글. 간지럽고 따듯하며 포근했다.
그리고...어떤 일도 괜찮았다.
'뭐 어때. 괜찮아. 집에 가면 내 고양이가 있으니까'.
(계속)
고양이를 키우면서 겪은 마음의 힐링을 담아봅니다.
사람과 동물이 이렇게 마음을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누구나 동물을 사랑하지 않을까요.
(CARE 사태가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