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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Feb 28. 2018

김어준에 대한 조선일보의 직설적이고 재치있는 대응 보며

조선일보답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6/2018022601610.html


 박은주 디지털편집국 사회국장의 칼럼. 제목부터 직설적이다. 앞서 올렸던 포스팅에서 자존심 높은 조선일보가 하루 이틀 뒤 본지에서 김어준을 어떤 식으로 다룰지 궁금하다고 말했었는데, 설마 했던 한 가운데 150km 직구를 꽂아 넣어버렸다.  본 칼럼으로 조선일보는 ‘김어준’ 개인을 하나의 ‘언론’으로 대접해주진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첫 줄부터 명확하다. 박은주 사회국장은 김어준을 “‘딴지일보 총수’라는 직함을 가진 진보 방송인 김어준 씨”로 명명했다. ‘언론’은 커녕 그를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 인정해주기도 싫다는 뜻이다. 아직까지 조선일보에게 김어준은 그들과 동등한 직업인은 커녕 사회를 어지럽히는 ‘불순물’에 불과한듯 하다.

 아주 짧다. 그리고 솔직히 국내 최고 언론 사회국장이 썼다는 칼럼치고는 그렇게 구조가 탄탄해 보이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조선일보다운’ 내공이 보인다. 조선은 본 칼럼을 통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한 마리 토끼는 김어준 사냥이다. 기타 언론 매체들이 김어준이 겉으로 뱉은 말 자체를 교묘하게 편집, 왜곡해 퍼뜨렸던 것과는 달리, 조선은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그의 말에 숨어 있던 의도, 혹은 설사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 자체가 함유하고 있었을 ‘어둡고 은근한 협박’을 캐치해 땅 위로 끌어냈다. 박은주 사회국장은 ‘성추행, 성폭행 피해자가 사실을 밝히기 까지 시간이 걸리는 이유’중 하나로 ‘조직’을 든다.


정조가 여성의 모든 것’인 시대는 지났지만, 성폭력 악몽을 공개하는 건 고통이다. 그럼에도 결단하는 건, ‘이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우리 조직이 이러면 안되는 것을 알기에’다.


 이는 글을 지탱하는 기둥 논리다. 하지만 도출 과정이 그리 명쾌하지는 않다. 근거로 제시한 사례 역시 (정해진 분량 상 문제가 있었겠으나)하나에 불과하다. 때문에 글이 전체적으로 뭔가 2% 부족한 듯한 ‘찝찝함’을 느끼게 한다. 이는 ‘미투’를 실천하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추론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그럴 법 하다. 영화계, 미술계, 연극계, 문학계 등 각종 ‘조직’들의 오랜 적폐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는 말은 ‘미투’ 과정에서 많이 들어본 것 같고, 공감도 된다. 도출과정이 어딘지 모르게 아쉽지만 심정적으로 공감은 가는, 다소 찝찝하지만 끊어지기 힘든 끈끈한 연결 고리. 이 정도면 독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기엔 충분하기에 박은주 사회국장의 펜은 과감하게 결론으로 향한다.


확언컨대, 앞으로 ‘진영’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미투’는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아주 맞는 말이다. 김어준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앞으로 어느 한 쪽 ‘진영’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미투는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김어준은 본인이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그 말로 말미암아 그러한 프레임을 짜고 말았다. 용기를 갖고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또다른 피해자들이 다시 한 번 자기 검열의 단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칼럼은 지금까지 중 가장 직설적이고 모욕적인 멘트와 함께 끝을 맺는다.


조직을 위해 여성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일, 그 유구한 남성의 악습을 김어준이 이어받습니다.

 

진보가 보수에게 할 수 있는 공격들을 그대로 보수가 진보에게 돌려줬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며 상대에게 또다른 프레임을 씌우는 진보의 ‘신식 전략’을 그대로 돌려줬으며, ‘구식 전략’인 ‘남성적 악습’ 굴레를 진보를 대표하는 김어준에게 씌워줬다. 김어준 본인이 글을 읽었다면 상당한 치욕을 느꼈을 법하다. 긴가민가하는 이들에게는 확신을 심어줬다. ‘말이 긴가민가한데 그래서 이번 건에서 이게 나쁜 새끼야 아니야?’하며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선’ 이들에게, “김어준 개새끼 맞아!”라며 안심하고 그를 ‘개새끼’로 봐도 될 근거를 선물한 것이다.

 본 칼럼은 ‘방향 지시등’의 역할도 겸한다. 칼럼은 김어준이 지른 한 방에 이거 어떡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보수 세력에게 “닥치고 질러!”를 지시한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한창 베이스를 돌던 주자가 상대 수비수의 페이크 동작에 베이스 사이에 멈춰 서 우물쭈물 하자, ‘조선일보’라는 주루 코치가 팔을 거세게 돌리며 “별 거 아냐! 쫄지마 씨바! 달려 이 병신아!”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두 마리째 토끼다.



 사실 내가 바른 쪽이라 믿던 방향의 대응은 아니다. 앞선 글에서도 주장했듯, 나는 김어준을 하나의 ‘언론’, 즉 ‘매체’로 보고 매체가 매체에게 대응할 때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상대해야 그가 그리는 (절대 동의하지 못할)‘큰 그림’을 방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이런 대응도 나쁘진 않다. 참 조선일보답고, 그래서 재미있기 때문이다. 어느 위대하신 분 말씀을 살짝만 바꿔 빌려오자면, 역시 재밌는게 제일 좋은 거 아니겠나? 재밌으니까 다 됐다.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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