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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트롱 Sep 23. 2018

<명당> 리뷰 - 소재만 바뀐 관상

신작영화리뷰

*스포 있음


‘관상’과 ‘명당’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관상은 얼굴을 보고 명당은 땅을 본다는 것? 그런 단순한 부분이 아니다. 핵심은 미래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관상은 미래를 고쳐주지는 못하지만, 명당은 미래를 고쳐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관상은 '팔자가 이러니 분수에 맞게 살아!' 라면 명당은 '거 팔자 한 번 고쳐 보시오!’가 되야 한다는 말이다. 과연 이 영화는 그 본질적인 차이를 잘 집어냈을까?

<관상> - <궁합> - <명당>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역학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조승우, 백윤식, 김성균, 문채원 등 배우진도 탄탄하다.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하반기 기대작 소리를 듣던 영화였다. 다만 우려됐던 점은 1부인 <관상>이 작품성으로나 흥행면으로나 상당한 평가와 성과를 얻은 반면, 2부인 <궁합>은 양쪽 모두 형편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명당>은 <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또다른 <궁합>으로 주저 앉고 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명당>은 결코 <관상>급의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궁합>급의 졸작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둘의 중간쯤으로 볼 수 있는데, 굳이 저울에 올려 무게를 가늠한다면 <관상>보다는 훨씬 <궁합>에 가까운, 그런 정도 수준의 영화다.


일단 스토리라인은 <관상>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심하게 말하면 <관상>에서 '관상'이라는 소재를 '명당'으로 바꾸면 영화 <명당>이 된다. 그런데 어째서 <관상>과 <명당>은 그렇게 전혀 다른 수준의 영화가 된 걸까? 일단은 주인공이 가진 능력의 아우라가 다르다. <관상>의 관상가 '내경(송강호)'의 관상 보는 솜씨는 관객들조차도 '햐, 용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관상가 캐릭터에 공감하고 몰입하게 된다. 하지만 <명당>의 지관(地官) '박재상(조승우)'은 그런 수준의 공감과 몰입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연기의 문제는 아니다. 배우가 조승우 아닌가? 문제의 원인은 영화 초입, 작중 배경과 주인공 능력 설명을 너무 빈약하게 가져간 데 있다.

'관상'과 달리 '명당'이라는 소재는 추상적이다. 관상은 얼굴을 딱 보여주면 끝이지만(이것저것 설명할 필요 없이 칼빵난 이정재 얼굴을 보여주면 수양대군이라는 캐릭터, 그리고 관상이라는 능력에 단번에 공감이 간다), 명당은 그렇지 않다. 산세가 어쩌고 물이 어떻게 흐르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만 그마저도 관상에 비하면 흐릿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관객들이 캐릭터에 몰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 초입부 배경 설명 부분을 조금 더 꼼꼼하고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명당>은 정반대로 초입부를 정말 빠르게 넘겨버렸다. 물론 배경 설명을 최소화하고 스토리 본류로 최대한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건 현대 영화 연출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 기본 지키려다 영화 전체가 딛고 일어서야 할 '지반'을 약하게 만들면 무슨 소용인가?


그러다보니 박재상이 이 땅 싸움에 참전한 명분인 ‘가족 복수’ 자체가 웃기지도 않아졌다. 일단 가족들이 등장하자마자 몰살당한다. 때문에 관객들이 박재상의 가족들과 유대를 쌓는 시간이 없다. 그러니 박재상의 가족 잃은 아픔에 공감을 많이 할 수도 없다. 복수 내용도 이게 뭔가 싶다. ‘장동 김씨(안동 김씨인데 논란 있을까봐 바꾼 거다)’ 가문 묘를 찾아서, 그 시체들을 터 안 좋은 곳으로 옮기겠다는 거다. 당장 현실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없는 복수 목표다. 전혀 긴장감 조성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뿐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전체가 총체적 난국이다. 모든 캐릭터가 평면적인 수준을 넘어 전형적이다. 박재상의 절친 ‘구용식(유재명)’은 오달수식 캐릭터 그 자체다. 오달수를 못 쓰니까 꿩 대신 닭이라고 유재명을 끌어다 놓고 오달수 연기 그대로 따라하라 요구했나 싶을 정도였다.

꿩 대신 닭. 오달수 대신 유재명

‘끼하하하’ 웃는 악당 지관 ‘정만인(박충선)’은 전형적인 악당 그 자체다. 문채원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항일독립운동 영화 찍을 때 여성 캐릭터 없으면 안되니 억지로 미모의 여자 배우 하나 집어넣는 그런 느낌이었다. 전형적인 ‘그’ 여성 캐릭터 느낌으로 역할하다, 전형적인 ‘그’ 공식대로 죽는다. 이 많은 캐릭터들의 고민거리는 단 하나 밖에 없다. 박재상은 ‘가족 복수’, 흥선군은 지 아들 왕 만들기, 김좌근과 김병기는 ‘묫자리’다. 세상 이런 단순한 사람들이 다 있느냔 말이다.


캐릭터 성격을 평면화 시킨 결과,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흥선대원군(지성)의 단순함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 됐다. 이 영화만 보면 흥선군은 자기 자식을 왕으로 만들어 팔자 한 번 고쳐보려는 단순한 역도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흥선군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목적이 출세에만 있었던 인물이 아니다. 양반들에게 ‘상갓집 개’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왕족으로서 끔찍한 굴욕의 시간을 감내한 그다. 흥선군을 내세웠다면 그가 고종을 옹립하기까지 보다 높은 차원의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물론 영화 중반부까지는 왕과 대화하며 나라의 안위와 왕권의 부실함을 걱정하기도 한다(이것도 웃기다. 상갓집 개 소리 듣던 양반이 시간만 나면 왕과 독대해? 온 궁궐이 김좌근 측근 밭인 마당에?). 하지만 영화 종반부에서 사실상 스스로 ‘팔자 고치겠다’는 투의 고백을 하고 만다. 그렇게 흥선군의 캐릭터는 역사적 사실과 정면 충돌하며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과 충돌하며 오류를 일으키는 대목은 흥선군 캐릭터 뿐이 아니다. 이 영화는 아예 조선 왕조 왕 하나를 삭제시켜 버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임금은 여러 배경들로 추론해 봤을 때 24대 헌종이다. 그런데 영화상 헌종 다음으로 즉위하는 고종은 26대다. 25대 철종은 어디로 갔는가?


영화의 짜임새가 없어도 너무 없다. 일례로 왕이 김좌근(백윤식)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은 원래 영화 상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가 됐어야 한다. 하지만 그다지 충격이 없다. 장면 자체가 너무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영화가 그 장면을 기점으로 갑자기 판타지로 넘어가 버린 느낌이다.

아무리 그래도 군신 관계를 한 순간에 뒤집어 엎는다니 말이 되나. 앞에 사전 작업을 잘 깔아뒀으면 또 몰라, 대뜸 의금부 전체가 사실은 한통속이었소? 그럴거면 김좌근은 앞서 문책을 피하기 위해 자신에게 동조했던 백관들을 왜 다 죽였나. 어차피 서로 다 알고 있었을 것을. 그리고 그 의금부는 영화 막판에 가서 갑자기 왜 흥선군의 편에 서는걸까? 허술해도 이렇게 허술할 수가 없는 영화 짜임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까자... 영화 마지막,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른바 ‘2대 천자 명당’에 세워진 절을 불사르는 흥선군을 보며, 주인공 박재상은 울부짖는다. “아이고... 2대만 천자 지내면 뭐하나. 그 이후 자네 증손들은 멸손 당한단 말일세!” ... 이게 무슨 개 풀 뜯는 소리인가? 그러면 진즉에 말을 해줬어야지. 절에 불을 지르기 전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뜸을 들이는데, 그 시간은 뭘 하고 있다가 막상 불 지르고 나니 그제서야 그런 혼잣말을 한단 말인가.


영화 편집이 과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겼다고 믿고 싶다. 애초에 소재 자체를 배급사나 영화사 측에서 제공한 느낌이니,  편집 과정에서 그들의 입김이 꽤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마 흥행에 성공해 감독판이 나온다면 한층 나은 짜임새를 보여줄 거 같긴 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2.0/5.0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로 시사권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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