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무너진 이들의 공포
*스포일러 있음
“이전에 프랑스 군이 이 참호를 썼는데 전멸했죠. 냄새가 별로 좋지 않을 겁니다. 보급이 부족해서 걔네 시체를 섞어 참호를 쌓았거든요.” 영화 초반부, 이제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신참 소위 ‘롤리(에이사 버터필드)’가 참호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듣는 설명이다.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죄로 총탄에 스러져, 결국은 참호의 재료로나 쓰이게 된 청년들. 이 영화는 그 수 많은 시체들의 과거요, 현재이자 미래였을 이야기다.
영화는 1차 세계대전 최전방 참호를 배경으로 한다. 말은 ‘전쟁 영화’라고는 하지만 총격과 포탄이 오가고 사람이 쓰러지는 전형적인 전쟁 영화스러운 장면은 영화 마지막을 제외하고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영화가 조명하고자 하는 전쟁의 인상은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 4일간, ‘평화로운’ 참호 속 전투원들의 '일상'이다.
시대를 잘 타고나 평화로운 시기에, 평화로운 땅(?)에 사는 우리는 역사서를 통해서, 혹은 뉴스를 통해서만 전쟁의 경과와 참상을 전해 들을 수 있다. 그런 우리에게 전쟁이란 누가 이기고 졌냐하는 결과요, 얼마나 희생되었는가 하는 숫자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서 속에 숫자로만 적힌 그 수 많은 희생자들 입장에서 전쟁은 현실이요 일상의 종말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도리가 없는(꾀병을 핑계로 후방으로 이송되고 싶어했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한 주임원사처럼), 너무나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국가와 시대의 무게에 잠식되어 공포에 떠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전쟁이다.
전쟁이라는 재해 앞에 개인은 한 없이 무기력하다. 인간은 최소한의 존엄도 잃은 채 숫자로 치환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전투에서의 희생이 당연시된다. 전쟁 승리 책임을 진 장군은 '전선 유지'를 위해 스탠호프 대위(샘 클라플린) 휘하 소대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시한부 죽음을 명하고, 부하인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품은 채 그저 명령을 따라 무기력하게 예정된 죽음을 향한다.
영화는 그들의 하루하루를 그저 관망하듯 보여준다. 이렇다 할 서사는 없다. 정해진 파국을 향해 흐르는 시간을 따라,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체념, 소소한 행복과 슬픔 등을(극대화 해)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두툼한 옷을 벗긴 전쟁의 속살은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비참한, 그리고 비정상적인 형태의 죽음. 그에 대한 공포로 미쳐가거나 혹은 자포자기한 인간 군상들. 그런 모습들에 계급이나 나이가 있을까, 국적이 있을까.
아군의 시체로 참호를 쌓았던 스탠호프 부대는 결국 그 스스로의 시신으로 참호를 덮는다. 참호는 새로운 시체들로 덮이고 또 덮였을 것이다. 무자비한 시대의 폭력, 전쟁이 끝난 순간까지.
★★★★
* <덩케르크>와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