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하나만 가진 무덤 없다
0.
한 여고생이 자살을 했다. 너무나 평범했던 아이였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목숨을 버린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럽다. 그녀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머리가 없는 누군가는 “공부도 잘하고 부모도 좋은 직장에 다니는데 왜 그랬을까?” 라고 묻는다. 죽은 자는 답이 없고 남은 자들은 답답하다. 학업 스트레스, 생전 다소 부족했던 커뮤니케이션 능력, 우울한 노래를 좋아하던 음악 취향 등 다양한 추리와 증언이 이어지지만, 어느 하나 '그럴 듯'한 답이 없다. 이제 그들은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의심의 눈빛은 영희(전여빈)에게로 모인다. 영희는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영화 <죄 많은 소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자살의 원인을 어느 하나로 특정 지으려 하는, 애초에 이뤄지지 못할 무리한 시도.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타인에게 죄를 전가시키려는 비겁함. 이 뒤틀어진 틈 사이에서 지옥도가 펼쳐진다. 한 없이 비겁해지는 이들과 모든 죄를 짊어진 채 강제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가 없지는 않지만 이런 정도의 벌을 받을 필요는 없었던 억울한 소녀가 충돌하며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인 지옥도다.
1.
모두가 영희를 의심한다. 영희가 죽은 경민(전소니)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같은 반 ‘친구‘들은 “네가 나쁜 생각을 오염시켰다” 라며 영희를 추궁한다. 경찰과 경민의 어머니(서영화), 심지어 담임선생조차 영희가 경민의 죽음에 주효한 역할을 했으리라 의심한다. 이미 죄인 판결을 받은 영희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영희는 죽음으로서 결백을 증명하려 시도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쓸모없던’ 목소리를 잃는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반전이 시작된다. 내 의견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도구인 ‘목소리’를 잃자, 그제야 비로소 그 간절한 억울함이 그녀를 의심하던 이들에게 전해진다.
누명을 벗고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영희는 예수와 같은 포지션이 된다.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에게 돌을 던지던 이들이 모두 영희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같은 반 친구들부터, 그들에게 괴롭힘 당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처신 잘하라” 라며 모른 척 넘어간 아버지, 담임선생 등 모두다. 초연한 표정의 영희는 그네들의 죄를 모두 사해주는 듯 보인다. 죄를 비는 이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끌어안아주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그녀의 마음은 겉보기로 알 수가 없다.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희의 속내는 영화 첫 장면의 진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 밝혀진다. 영희는 수화로 “너희들 앞에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한다. ‘죄 받이’가 되어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던 그녀는 이 ‘죄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복수를 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2.
영희의 복수는 자신의 죽음이다. 더 명확히 말하면, 한 가지로 추론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죽음의 원인‘을 남겨두고 시행하는 자살이다. 영희가 택한 ‘원인’은 유일하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끝까지 쫓아와 괴롭히던 경민 어머니다.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영희에게 “너도 빚이 있다. 넌 경민이 도움으로 살고 있는 거다” 라며 죄를 떠넘긴다. 그런 그녀에게 영희는 말한다. “내일이면 내가 왜 죽었는지 사람들이 물어볼 거다. 그 이유나 잘 대답하라”라고. 경민 어머니는 그제야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또 한 편으로는 지금껏 자신이 영희에게 모든 죄를 떠넘긴 일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해(혹은 강한 자기부정)를 시도한다.
3.
영화 마지막 씬에서 영희는 “내가 그 날 다 들었다. (경민이) 죽으려는 이유가 너무 이해가 돼서 말릴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남겨진 이들은 결코 알 수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흔적들을 더듬어가며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추론 과정에서 “아, 코끼리는 뱀과 같은 생물이군!” 하는 식으로 단정해서는 안되며, 그런 식으로 이유를 확정할 수도 없다. 영화 속 교장처럼 어느 하나의 ‘그럴듯한 ‘ 이유를 찾으려 해서도 안된다.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버리는 결단을 내린 이의 한(恨)이 어디 하나뿐이랴. 그가 이승에서 겪은 그 모든 사연이 이유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옛말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라고 하지만,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핑계 하나만 가진 무덤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 주변의 누군가 갑작스러운 자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인연이 얕았을 지라도, 그와 접촉했던 개별 사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지 않을까? 또 그 순간 내가 좀 더 친절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같은 죄책감이 얕게나마 떠오르지 않을까? 영화 속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경민이 겪은 그 모든 것이 자살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렇기에 그들 모두가 각자 나름대로 경민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무척 조용하고 마땅한 친구도 없던 ‘은따’ 경민에 대한 죄책감을, 일진 아이는 또 나름의 추억에 얽매인 죄책감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의 죄책감을 경감시키고 스스로를 죽음의 이유에서 배제‘해내기’ 위해, 보다 확실한 하나의 원인을 찾아 ‘죄 받이‘ 삼으려 한다. 이는 그래서 죄 받이로 지목된 영희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자’인 탓에 묻힌 경향이 있지만, 영희가 보인 행보 역시 비겁하긴 매한가지다.
담임선생 역시 반 아이의 자살에서 온 강한 죄책감을 떨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악당이 아니다. 개인으로 놓고 보면 반 아이의 자살을 겪은 젊은 남성 교사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가 경민의 장례식 날 영희에게 “우리 모두 힘들다. 네가 이러는 게 경민이를 더 상처 주는 일이다”라며 터뜨린 분노가 진실된 것이었다고 본다.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도 경민 어머니는 가장 강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남편의 “그러니까 잘 챙겼어야지! 엄마란 사람이 지 일하는 거에만 미쳐가지고”라는 무책임한 말에 뭐라 제대로 된 대꾸도 못하고 오열한다. 아이의 자살에 부모의 책임만큼 무겁고 직접적인 요소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도 마음 깊은 곳에서 이를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강하게 영희에게 집착한다. ‘내가 딸을 죽였다’는, 어쩌면 지나친 정도의 죄책감을 어떻게든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녀는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비겁한 인물로 보인다.
4.
이 영화가 특히나 불쾌한 이유는 너무나 강한 현실성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정말이지 끔찍한 사건과 인물들만 한데 엮어 놓은 한 편의 지옥도다. 이승(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인물 하나하나, 그들이 보이는 일상 하나하나를 파고들어보면 이렇게 현실적일 수가 없다. 하나의 큰 사건에 느끼는 책임. 이를 회피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비겁한 행동들. 너무나 일상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지극히 현실적인 지옥도라고 일컫는다. 현실이 지옥인지, 지옥이 현실인지 도무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만든다.
4.0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