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있고 사람 있나, 사람 있고 나라 있나
김상헌(김윤식)과 최명길(이병헌)은 쉬지 않고 아뢴다. 관객은 인조(박해일)가 되어 둘의 충심 어린 간언을 묵묵히 들어야 한다. 그들의 말은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아 보인다. 어느 한 쪽 주장이 옳다고 믿고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그들의 논쟁이 지속됨에 따라 서서히 경계가 허물어지고 판단에 의심이 생긴다. 무엇이 옳은가? 나라 있고 사람이 있나, 사람 있고 나라가 있나. 삶 이후에 굴욕과 창피도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삶을 이어갈 바에 여기에서 삶을 접는 게 나은가.
“항복하느니 죽자”고 간언하는 김상헌은 얼핏 보수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상헌이 품은 상상력은 누구보다 진보적이다. 그는 어떻게 해야 진정한 새 시대가 열리는 지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새 시대의 개벽을 위해서는 그 이전의 한 시대가 깔끔하게 끝이 나야 한다. 분명한 종언 없이 들어선 새 시대는 과거의 수많은 적폐와 부정을 그대로 품은 채 껍데기만 갈아끼운 양두구육일 뿐이다. 그래서 김상헌은 누구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 시대 하에서 벌어진 죄, 부덕함과 실패는 그 시대의 것으로 끝을 내야 한다. 그런 그가 보기에 최명길의 “일단 살아야 국가도 체면도 있는 것”이라는 주장은 격통을 겪으며 죽음을 원하는 환자에게 강제로 호흡기를 달아 불운한 현실을 억지로 더 살게 하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그는 국가를 생각할 때 민중을 떠올린다. 영화 내내 직접 백성들을 찾아가 그들과 소통하며 어루만지는 이는 최명길이 아니라 김상헌이다. 그가 보기에 국가란 백성이 있은 이후 존재하는 개념이다. 민중이 이토록 가혹한 환경 하에 살고 있는데, 조선이 이어져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모아 맞부딪혀본 뒤 그대로 산화하는 게 옳다. 조선의 모든 불행과 불운을 남한산성에 담은 채 완전히 불태우고 끝내야 한다.
“일단 살아야 국가도 체면도 있는 것”이라며 유연한 논리를 내세우는 최명길은 얼핏 진보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지로 그는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그가 굴욕을 감내하고 국가를 보전하려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민중에 있지 않다. ‘일단 살아야 한다’고 삶을 강조하는 주장과 영화 내내 희생을 강요당하는 백성들의 고통이 맞물려 착각을 유도하지만, 사실 최명길이 말하는 ‘일단 살아야’ 하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왕’이다. 그가 말하는 국가란 왕과 동의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살아야 국가가 살고, 국가가 살아야 미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지극히 보수적이다. 그러나 그 역시 틀리지는 않았다. 다소 냉정해 보일 수도 있고 꼴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유전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잿더미가 되어 버린 땅에서 주춧돌부터 새롭게 쌓아올리는 일은 지독하게도 힘든 일이다.
영화 내내 갈팡질팡하다 끝내는 청 황제에게 굴욕의 고두배를 바치는 인조는 암군인가?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군주로서의 고뇌와 일반 민중으로서의 고뇌는 다른 종류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봤을 때, 왕은 속히 항복해야 옳다. 그러나 왕에게 이는 쉬운 판단이 아니다. 왕은 국가를 존속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또다른 한 편으로는 자존심과 체면을 세워 국가의 낯을 가리지 않아야 할 의무도 있다. 왕은 곧 국가와 같았던 시대, 왕의 굴욕은 국가의 굴욕이요, 왕의 죽음은 국가의 죽음이다.
영화는 눈과 얼음에서 시작해 불로 끝난다. 눈과 얼음은 가혹하다. 그것들은 남한산성에 갇힌 불쌍한 이들의 먹을 것을 빼앗고 추위와 질병을 가져온다. 동시에 저승사자들(청나라 군대)의 길이 되어 주기도 한다. 불은 그런 얼음과 추위를 녹인다. 판타레이, 불은 곧 변화다. 대장간의 불은 삐뚤어진 것을 바로 잡고 틀을 만들어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불이며, 생명의 불이다. 우리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끝이 정해진 ‘역사 영화’에서 마지막을 불로 장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남한산성>은 2017년 10월에 개봉한 영화다. 탄핵 정국 이후, 새 정부가 갓 들어섰을 때다. 영화의 불은 조선대가 아닌, 현실 속 대한민국의 새 시대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담고 있는 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어떨까. 현실의 새 대장간은 당시 영화의 기대를 잘 충족시키고 있는걸까? 그런 것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역사 영화에 현재의 인사이트를, 마치 눈이 녹아 땅 속으로 스며들듯 조용히, 자연스럽게 녹여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남한산성>은 그 힘든 일을 잘 해낸 웰메이드 영화다.
4.5/5.0
p.s) 역사대로라면 심양으로 압송되었을 김상헌의 할복 자살 마무리는 다소간 아쉽다. 할복은 일본의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