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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군 Mar 13. 2018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

로테이션 1, 열여섯 번째 날. 열정 페이.

선진국 미국에서는 최저 임금도 그리 낮지 않다면서?

특히 사람 많은 캘리포니아는 물가 따라 최저 임금도 높은 편이라면서?

그치 ... 그렇지. 근데 이건 로테이션이랑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약대 인턴으로서 약국에서 로테이션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졸업할 때 필요한 학교 수업 크레딧을 받는 대가로 일주일에 40시간씩 무상으로 일해주는 것을 뜻한다.

나는 지금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열정 페이 당하는 중이다.


입금이 조금이라도 되면 좋겠다


그래도 P3(약대 3학년생)으로서 하는 로테이션은, 좋게 생각하면 서류 전형 통과 여부 상관없이, 인터뷰 걱정 없이 채용(?) 되어서 다양한 약국 환경 속에서 이것저것 경험해 볼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다.

2018년 올해 2월부터 시작된 P3로테이션은 올해 12월에 끝이 나는데, 그 기간 동안 여섯 개의 로테이션(rotation--말 그대로 여기저기 돌고 도니까)을 거치게 된다.

동네 약국은 물론 주립 병원, 국립 병원, 정신병동 약국들, 학교 교수님 리서치 도와드리기를 포함해 HIV 클리닉, 보험회사의 매니지드 케어 분야, 해외 (한국, 타일랜드 등) 다른 약대의 부속 약국 등 보통 아직 학생인 인턴으로서 일자리 구하기는 별따기인 분야에서도 로테이션을 신청할 수 있고, 또 좋은 확률로 원하는 로테이션에 배정되는 편이다.


나도 P1학년 때부터 너무나 경험해보고 싶었던 매니지드 케어 (managed care) 분야의 로테이션을 시작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지내고 있다. 지금 이 로테이션을 시작한 지 이제 4주 차이지만, 결과물이 벌써 나온 프로젝트들도 있고 아직 활발히 현재 진행형인 프로젝트도 더 많다. 많이 배우고 있고, 여기 일이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건 살짝 비밀인데, 여기서 마지막 주 즈음 "너 여기서 계속 일 안 할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상상도 곧잘 한다.) 내 담당 약사 프리셉터가 군것질을 정말 좋아하셔서 사무실을 초콜릿과 마시멜로로 가득 채워놓으시는데, 인턴 학생들에게 언제든 맘껏 먹으라고 하신다. 그것도 좋다.


근데 오늘 아침부터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점심때가 되어도 배가 안고팠다. 해야 할 일도 꽤 많았고,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도 아기 낳은 이후로 계속 꾸준히 들고 있고, 게다가 지금 당장 배도 안 고프겠다 그냥 점심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맛있게 먹는 프리셉터 앞에서 점심을 안 먹고 일 하면 그만큼 일찍 보내줄 것 같다는 깜찍한 생각이 들었는데 ...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그렇게 잘 나눠주는 착한 프리셉터도, 결국 프리셉터는 프리셉터일 뿐이었나 보다.

자기보다 학생들을 먼저 집에 보내주기는 좀 그랬는지, "오늘 좀 피곤해~ 퇴근 조금 일찍 할게"라고 밑밥을 먼저 깐다. 그런데 그 뒷말을 듣고 속에서 버섯만 한 크기의 아주 작은 화산이 터졌다. "너무 오래 일 하지는 말어,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뭐야? 나도 프리셉터 갈 때 같이 가려고 했는데? 오래 일 하지 말라는 게, 자기는 집에 가도 난 여기서 일 더 하라는 건가? 내가 배고파서 예민해졌나? 근데 점심 안 먹은 거 빤히 알면서, 굳이 얘기하면서 지금 더 있으라는 거야 뭐야?


평소 같으면 프리셉터가 짐을 싸던 그 순간일지라도, 내 하던 일이 다 안 끝난 상황이라 프리셉터가 집에 가라고 등 떠밀어도 남아서 하던 일은 다 끝내고 나왔을 나였다. (실제로 지난주에도 이 약사 프리셉터와 같은 사무실을 쓰는 의사 프리셉터보다도 내가 집에 늦게 간 날이 많기도 했고 ... 잠깐, 지금 생각해보니 오늘도 이 의사 프리셉터는 일찍 집에 갔었잖아?!)

근데 뭔가 "너는 원래 일 열심히 하니까 오늘도 열심히 해, 근데 너무 오래 하지는 말어"라고 선심 쓰듯이 뱉은 그 말이 마음속에 와서 꽂혔다. 비수 까지는 아닌데 압정 정도 되어서 꽂힌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랑 말 잘 하고 친하게 지내는 프리셉터는 집에 가는 길에 짐 싸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데만 몇십 분이 걸린다. 그동안 나도 그냥 짐을 다 싸버렸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하던 프리셉터가 진짜로 자기 짐 다 챙겨서 나가려 할 때 나도 같이 나왔다. 평소 같으면 엘리베이터도 같이 타고 내려왔을 텐데,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앉아있어서 (?) 다리가 저리다는 핑계와 함께 난 계단으로 내려가겠다고 하고서 나왔다. 나름 작은 복수였다. 근데 주말 사이에 계단 난간을 새로 페인트칠 했는지 계단으로 내려가는 내내 코를 찌르는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직도 정말 프리셉터가 못되게 말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끼니를 거른 탓에 몸이 예민 했던 건지 조금 헷갈린다. 내일부터는 밥 잘 챙겨 먹고 더 열심히 배우고 더 열심히 일 해야겠다. (결론이 이게 아닌가?)


+ 제목 배경 이미지의 출처는 여기 -- 카카오 공식 블로그

+ 열정 페이 일러스트의 출처는 여기 -- 약치기 작가로 유명한 양경수 님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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