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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군 Mar 19. 2018

EBP를 아십니까

로테이션1, 스무 번째 날. 근거 기반 실무.

3년 전 약대 들어와서 1학년(P1)이 된 지 이틀 째 되는 날, 성이 너무 길어 "Dr. J"로 불리는 교수님의 수업이 있었다. EBP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주제에 대한 두어 시간 정도 되는 입문 introduction 강의였는데, 짧은 수업을 마치시며 교수님은 "오늘 나는 두 시간 말하고 말지만, 앞으로 2년 반 동안 이 EBP에 대한 수업이 간간히 있을 겁니다. 우리 자주 볼 거예요!"라고 하셨다.


우리 학교는 한 주제로 엮인 질병들을 한 번에 배우는 블록 시스템(block system)인데, 보통 한 주제로 3-4주 정도 수업한다 (예를 들어, 정신 질환 mental health 블록에서는 우울증 depression, 조현병 schizophrenia, 양극성 장애 bipolar disorder 등을 묶어서 배우고, 신진대사 장애 metabolic disorder 블록에서는 당뇨병 diabetes, 고혈압 hypertension, 이상 지질 혈증 dyslipidemia 등을 묶어서 배우는 식). Dr. J의 말씀대로 각 블록마다 조별 EBP 프로젝트가 하나 이상씩 있었는데, 반 친구들은 이 EBP를 좋아라 하는 친구들과 EBP를 무지무지 싫어하는 친구들 두 분류로 나뉘게 되었다. 나는 EBP를 좋아하는 편, 그중에서도 무지무지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EBP는 evidence-based practice의 줄임말이다. 가볍게 해 본 구글 검색 결과에 의하면 한국어로는 "근거 기반 실무" 혹은 "근거 기반 실제"로 불리는 것 같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 EBP는 EBM(evidence-based medicin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EBP가 무엇인고 하면, 일단 1) 어떤 환자와 2) 그 환자의 질환 상태, 그리고 3) 써지고 있거나 써질 약이나 치료법이 주어졌다고 해보자. 이 상황에서 우리는 그 약이나 치료법이 이 환자에게 정말 효능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경우가 있다. EBP는 이 환자의 상황과 최대한 비슷한 상황에서 리서치를 한 논문을 찾아서 논문 속의 결론을 이용해 (근거 기반) 이 환자의 상황(실제)에 적용 함으로써 이 환자에게 그 의문의 약이나 치료법을 쓸지 말지 결정하는 것이다. 써질 논문을 잘 찾는 것이 중요한데, 논문 속 연구의 참가자들과 환자의 조건이 비슷할수록 EBP를 잘 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또 논문 속 연구의 종류에 따라 EBP에 대한 신뢰도와 EBP 자체의 질이 달라진다 (무작위 대조군 연구 randomized controlled trial 인지, 관찰 연구 observational study 인지 등에 따라).


EBP는 의학 전문 지식, 리서치 결과, 또 환자의 상황 이 세가지가 만나는 접점에서 이루어진다 


EBP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첫 발걸음은 좋은 논문을 잘 찾아내는 것인데, 이에는 아무 사전 정보 없이 환자와 환자의 상황만 있는 상황에서 관련 논문을 딱 찾아내는 것은 물론, 신문 기사나 다른 매체에 언급된 논문의 전문을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도 포함된다. 논문들을 찾을 때 내가 주로 쓰는 데이터베이스는 PubMed와 EMBASE이다. (연구들의 결과를 발표하는 논문들이 아닌, 전문가들에 의해서 추려진 정보들을 찾을 때에 요긴하게 쓰이는 데이터베이스로는 Lexi Comp, Micromedex, UpToDate 등이 있다. 또 각 질병들의 치료 단계를 정리해 놓은 가이드라인을 찾을 때에는 National Guideline Clearinghouse 를 쓴다. PubMed와 EMBASE를 포함하여 여기에 언급된 모든 사이트들은 정기적으로 구독권을 구매해야 사용할 수 있는데, 나는 학교를 통해서 구독권이 있기 때문에 이 사이트들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학비에 구독권 포함되는 건 안 비밀. 졸업하자마자 이 사이트들 구독권 잃는 것도 안 비밀.)


아무튼, 지금 하는 로테이션에서 약사님이 가끔가다 나와 나의 코인턴에게 "이 기사에 나온 이 논문 좀 찾아달라" 부탁하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런 논문 찾는 걸 좋아하고 빨리 하는 편이라 그런 부탁 하시자 마자 5-10분 안에 논문 찾아서 찾는 경로를 알려드리곤 했었다. 또 논문뿐 아니라 "관절염 치료에 관한 UpToDate 기사들 좀 보내달라," "우울증 치료에 관한 가이드라인 좀 찾아달라," "이 약을 환자가 30일 동안 쓰면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달라" 얘기하실 때마다 나로서는 어느 웹사이트에서 어떤 정보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나름 빠삭히 알고 있는터라 이런 질문들은 나의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소위 "거저먹는 질문"들이었다.


지난 화요일, 약사님은 안 계시고 의사 프리셉터와 나와 코인턴 이렇게 셋이서만 사무실에 있었는데, 나랑 코인턴은 각자의 방에서 스카이프로 하와이에 있는 다른 약사님과 셋이서 미팅 중이었다. 그런데 의사 프리셉터가 나에게(만!) 메일을 보내오셨다. 아마 약사님이 의사 프리셉터와 얘기하신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이 의사 프리셉터의 이메일에는, 보시던 기사에서 "두개골 기형이 있는 신생아들을 상대로 헬멧 치료에 관한 논문이 언급되었는데, 그 논문을 좀 찾아달라"며 논문의 저자와 doi번호를 주셨다. 이건 진짜 거저였다. 왜냐면 doi 번호만 있으면 논문 찾는 건 진짜 쉽기 때문이다 (PubMed 같은 데이터베이스에 말 그대로 복붙 하면 나온다). 미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후다닥 논문을 찾아 보내 드렸다. 하와이 약사님과의 미팅이 끝나고, 코인턴은 집에 곧장 갔지만 나는 의사 프리셉터와 잠깐 말할 기회가 있었다.


EBP를 좋아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의사 프리셉터는 최대한 활용하려 노력 많이 한다고 대답하셨다. 의사 프리셉터가 의대생일 때만 해도 EBP는 중요하게 가르치는 부분이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 (그 요즘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 인지는 잘 모르겠다 ...) EBP의 중요성이 많이 부각된다면서, 잘 하고 좋아하면 앞으로 약사가 되어서 환자들 만나고 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그러셨다.


Dr. J는 첫 EBP 수업 동안 EBP란 말을 처음 들어보는 우리 P1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여러분은 이게 뭔지 하나도 못 알아들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부터 2년 후, 로테이션을 시작하면 지금 이 수업 내용과 나를 생각하며 많이 고마워하게 될 거예요.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고서 Dr. J는 그녀의 옛 제자들에게서 온 이메일을 보여주셨었다. 그 당시 로테이션에 나가 있던 P3, P4의 이메일이었는데 다들 EBP의 중요성을 비로소 로테이션 나와서 깨닫게 되었다고, 고마움을 전하는 내용들이었다.


EBP를 무지무지 싫어하던 반 친구들도 로테이션하면서 슬슬 그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있을까? 학교에 있는 동안 교육 과정에서 EBP를 중요한 부분으로 심어놓아 탄탄히 배울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지금 병원 로테이션을 하고 있는 친구들 말에 의하면 1주일에 한 번씩 EBP를 이용해 논문을 비평 critique 하고 병원 스태프들 앞에서 발표하는 과제가 있다고 한다. 내가 로테이션할 병원에서도 이렇게 저널 클럽 활동을 활발히 시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배운걸 어느 로테이션에서든 써먹으며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게 참 중요한 것 같다.


+ 제목 부분 이미지 출처는 여기

+ 중간에 있는 EBP 다이어그램의 출처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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