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군 Mar 24. 2018

캘리포니아에 비가 오면

로테이션 1, 스물네 번째 날. 비가 온다.

지난주 내내 일기예보에서 "다음 주에 비 와요~" 한참 그러더니 오늘 아침부터 드디어 (?)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근데 비가 온다고 해 봤자 그냥 가랑비 수준이다. 우산 안 받고 밖에 서 있으면 너무나도 자잘하게 떨어지는 빗물에 얼굴이 따끔따끔 한 정도?

보통 캘리포니아에서의 "비"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폭풍우가 몰아치고 눈보라 치는 다른 주들에 비해서 정말 발톱의 때 보다도 적은 타격을 주지만, 그래도 캘리포니아에서 오랫동안 산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온) 사람들에게 비 오는 날은 충분히 "평소보다 주의 깊게 지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내리는 비는 정말 귀여운 수준이다. 그나마 북부 캘리포니아에서는 한국 장마철이 생각날 만큼 비가 오는 날이 그래도 일 년에 2-3번 정도씩은 있다.)


9시에 도착한 로테이션. 약사님은 매일처럼 오늘도 일찍 나와서 일정 체크 등을 벌써부터 하고 계셨다. 50 마일이 훌쩍 넘는 도시에서 출퇴근하시느라 교통 체증 피하신다고 아싸리 일찍 와계시곤 한다. 그런데 약사님, 오늘 중요한 미팅이 두 개가 있었는데 둘 다 취소되었다고 울상이셨다.

"나 오늘 집에서 일해도 될 뻔했네 그럼! 가뜩이나 비 오는 날에 운전하느라 신경이 쓰이는데."

지난 두 주 사이에 딸과 남편분께서 각각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신경 쓰시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스트레스받는 일 있을 때마다, 안압이 높아지는 녹내장glaucoma도 있으셔서 요즘 스테로이드 안약도 넣고 계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미팅이 취소된 이유가 조금 아이러니했다. 미팅은 오하이오 주 등 타주에서 일하시는 다른 약사님들과 하기로 되어있던 건데, 다른 주에서는 출근을 못할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는 것이다. 뭐, 여기 캘리포니아에서도 비가 오고 있기는 하지만 ... 그래도 추운 주에서는 눈이 많이 내려서 학교가 쉰다는 얘긴 들어봤지만 도대체 비가 얼마나 많이 오면 출근도 못하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로 하시는 말씀이, "원래 이렇게 자연재해가 있으면 그래도 일에는 차질이 없게 BCP를 잘 세워야 하거든? BCP가 뭐냐면 business continuity plan의 줄임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업무는 계속 처리되게끔 미리부터 계획을 세워놓는 거지. 특히 우리같이 환자들 건강이나 치료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사람들이 BCP도 없이 일을 하면 정말 안되는 거잖아. 근데 나랑 내 예전 동료랑 말장난했던 게, BCP는 또 birth control pill의 약자도 되잖아? 피임약. 근데 이게 또 말이 되는 게 피임약도, business continuity plan도 '백업' 플랜이라는 것이지."

누가 직업 약사 아니랄까봐 ... 농담도 참 약사답게 하신다.


약대에 들어오면서 개인적으로 하나 크게 잡았던 목표는 클럽 활동 왕성히 하기였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초등학교 때 나름 영재 과학반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 방과 후 수업으로 영어/컴퓨터 등을 배우기도 했고, 중학교 때 "누리단" 창단도 해보고, 고등학교 때는 과학부도 들고 나름 이것저것 해봤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온 이후로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냥 괜히 마음의 여유 없이 오로지 공부만 해왔었던 것이다. 나름 열심히 클럽활동하는 다른 친구들 보면서 부러운 마음 한가득 이었는데 막상 나 스스로 열심히 해볼 용기는 안 났었다. (나름의 변명으로는 언어의 장벽, 시간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약대에 입학 하기 직전, 아직 약대 수업도 한 번도 안 들어본 내게 어떤 병원 약국에서 일자리 인터뷰를 할 기회가 주어졌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떨어졌다. 말만 약대생이지 아직 약대 관련 경험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내가 인터뷰에서 대답을 약사님들이 원하는 대로 잘 했을 리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고군분투 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대부분의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는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도 없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그런 질문이 하나 있었으니 -- "Tell me about your leadership experience" (리더쉽 경험을 말해주세요).

클럽 활동 등 대외 활동에 대해 묻는 질문이었는데, 내가 뭐 한 게 없으니 대답할 거리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인터뷰를 망치고 온 날 나는 결심했었다. 약대 들어가면, 졸업하기 전에 내가 그 대단한 "클럽" 활동들을 한번 해 보겠다고.


약대에 들어가서 보니 우리 학교에서 약대 학생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열려있는 큰 클럽들은 4개였다. 각 클럽들의 관심사는 조금씩 달랐는데, 미국 전체를 잇는 약사 연합회(American Pharmacists Association; "APhA"), 병원 약국에서 일하는 약사들의 집단(California Society of Health-System Pharmacy; "CSHP"),  개인 약국 운영하는 약사들의 연합회(National Community Pharmacists Association; "NCPA"), 그리고 1학년 P1 학생들에게 많이 생소했던, 매니지드케어 약사 학회(Academy of Managed Care Pharmacy; "AMCP")의 학생 버전 student chapter 클럽들이었다.

이 중에서 제일 인기가 없었던 클럽은 제일 마지막에 말한 매니지드케어 약사 학회, AMCP였는데, 그래서 나는 이 클럽의 임원 자리를 공략했고, 당당히 임원직에 당선되었다. (총 8개의 임원직 중 단 한 자리만 경쟁이 있었고 나머지는 "혼자 출마해서 혼자 당선된" unopposed 형국이었다 ...)

그런데, 별생각 없이 "내 이번 학교에서는 클럽활동을 열심히 해보리라!"하고 무모하게 시작했던 것과 달리, 내가 맡게 된 임원직(director of communication and marketings -- 홍보차장 정도?)과 이 클럽의 취지 자체가 나와 너무 잘 맞았다. 일 년 내내 활동을 정말 열심히 재밌게 했고, 클럽 활동 내역들은 나의 레쥬메와 CV (curriculum vitae)를 한 줄 한 줄 채워주고 있었다.


클럽 이벤트마다 이런식으로 플라이어를 만들어 페이스북에 포스트 하는게 나의 주 임무였다


다음 해 1학년이 2학년이 되고, 또 모든 클럽의 임원직들 기간이 끝나갈 무렵, 120명 정도 되는 우리 반에서 단 5명이 특별한 초대장을 받았다. PLS(Phi Lambda Sigma; Pharmacy Leadership Society)라고 하는 클럽에서 지난 1년간 특출 나게 리더쉽을 보여온 다섯 명의 학생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인데, 그 다섯 명 중에 내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진짜 내가 그 초대를 받을 자격이 있었나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약국 인터뷰에서 아무 말 못 하고 어버버 대던 초보 약대생이었던 내가 1년 사이에 이만큼 컸구나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2학년으로서 초대를 받은 다섯 명은 그다음 해에 PLS 임원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인정받는 리더쉽 가득한 다섯 명이었던 만큼 이 임원들은 정말 정말 같이 일하기가 편했었다. (각자 자기 역할은 물론 서로의 역할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또 언제나 먼저 돕고, 제안하고 또 가장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아는 친구들이었다. 난 이 1년간 임신 중이었는데 정말 이 클럽 일로 스트레스 하나 받지 않으며 무사히 임원 활동을 마쳤다.)

PLS 임원직으로서 또 하나의 특권은 당신 학생들 잘 챙기기로 유명하신 닥터 호프만의 특별 레이더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이지만 내가 약대 지원하고 인터뷰하러 왔을 때 닥터 호프만이 나를 인터뷰하셨었다.) 어디 멀리 출장 갔다 오시거나 유럽 등 해외에서 하는 컨퍼런스에 다녀오시는 길에 꼭 PLS 임원들 선물을 사 오셨는데, 어느 날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 중 하나인 Kate Spade 에서 산 우산을 주시기도 했다.

그렇다. 이 모든 클럽 얘기는 결국 이 우산을 자랑하기 위한 도입부였던 것이다!

클럽 얘기 끝.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지역이라 우산을 쓸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가끔씩 쓸 때마다, 아니면 보기만이라도 할 때마다 닥터 호프만이 생각나고 그런다.

사실 이 "PLS" 클럽 얘기에 관해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 이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도록 해야겠다.


다시 오늘 이야기로 돌아와서.

오후 3시쯤 되자 약사 프리셉터는 비 때문에 미끄러워진 길을 그나마 밝을 때 운전해서 가고 싶으시다며 슬슬 퇴근을 하셨고, 오후 4시쯤 되자 의사 프리셉터도 다른 날보다 집에 조금 일찍 들어가셨다. (사실 오늘은 의사 프리셉터의 생일이었다.) 나랑 코인턴은 의사 프리셉터까지 떠난 후에도 남아서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으나 ...

비가 와서 그런지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았다 (?).

그래서 우리도 그냥 4시 15분쯤 각자 집으로 떠났다.


오늘의 로테이션 이야기 끝.


+ 제목 부분 배경 사진 출처는 여기

매거진의 이전글 EBP를 아십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