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인데 쉬지도 못해
한국에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미국 와서 새로 배운 많은 것들 중 하나는 특정 질병에 관한 "걷기 대회"나 "달리기 대회"가 많다는 것이다. 유방암, 에이즈, 심장질환 등의 병을 가진 환자와 그 가족과 친구들이 참가해서 질병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또 연구 기금이나 치료비 등을 모금하는 이벤트이다.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완치되었거나, 혹은 질병으로 돌아가신 환자분들을 개인적으로 모르는 일반인들도 그냥 이벤트에 참가하여 같이 걷거나 달릴 수 있다.
오늘 심장 질환 & 뇌졸중 걷기 대회에 다녀왔다. 원래 남편과 함께 가려고 계획했었는데, 토요일인 오늘 남편이 갑자기 일을 하게 되는 바람에 그냥 아기와 나 둘이서만 다녀왔다. (시어머니께서 토요일에는 친구들 만나러 나가곤 하시는데, 필요하면 아기 데리고 나가실 수 있다고 그러셨지만 왠지 오늘마저도 시어머니께 아기를 맡기고 가기가 너무 죄송스러워 그냥 나 혼자라도 아기를 데리고 나갔다 왔다.)
집에서 30 마일 즈음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애나하임에서 있는 이벤트였다. 갔더니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각자 로테이션 나가 있느라 이제 얼굴 보기가 힘든 반 친구들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아기를 처음 본 친구들도 있었고, 그전에 아기를 만났던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아기를 보고 10개월짜리 아기가 벌써 이렇게 크냐며 놀라워했다. 아기는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울지도 않으며 유모차에 얌전히 앉아 엄마가 주는 과자를 잘 받아먹었다.
"걷기"가 시작되고 친구들은 유모차 주위를 맴돌며 아기의 수호천사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여담이지만 걷기 대회 장소가 "Angel Stadium"이어서 친구들에게 자꾸 "Thanks for being guardian angels for the baby!"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보통 이런 걷기 대회의 경로는 휠체어를 탄 환자분들이나 유모차를 끌고 오는 가족들을 위해서 계단도 없고 경사도 완만하거나 거의 없는 길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의 걷기 대회도 그러했지만, 착한 친구들은 작은 턱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나보다도 먼저 알아차리고서는 유모차를 다 같이 들어서 옮겨주곤 했다. 또 유모차 앞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나 대신 양해를 구해주며 유모차 갈길을 터 주곤 했다.
임신했을 때도 반 친구들 덕분에 정말 많이 배려받으며 편하게 학교 다닐 수 있었는데, 오늘 같은 날에도 친구들은 아기의 이모/삼촌 노릇을 톡톡히 해주며 정말 이 아기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은 우리는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사진을 찍고, 각자의 하루 계획에 맞춰 할 일들을 하러 흩어졌다.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걸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걸은 거리는 5 km 였다.
걷기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애나하임 근처에서 일하시는 엄마 아빠 얼굴을 보고 가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구글맵으로 Angel Stadium로부터의 거리를 찾아보니 채 5-6마일도 안 되는 거리에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세탁소가 있다고 나왔다. 늘 내려갈 일 있을 때마다 전화를 먼저 하고 가지만, 오늘은 왠지 그냥 가서 놀래켜드리고 싶었다.
아기와 내가 세탁소에 딱 나타나지 엄마랑 아빠 둘 다 참 좋아하셨고, 같이 점심을 먹고 난 후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아기를 보는데, 남편이 일을 마치고 4시쯤 돌아왔다.
피곤한 게 쌓였는지 막 온 남편에게 아기를 넘기고 한 40분 정도 낮잠을 잤다. 저녁에 또 참가해야 하는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어야 했다. (졸음운전하면 안 되니까)
저녁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50마일 떨어진 도시에서 있던 CKAPhA Spring Mixer 이벤트에 참가해야 했다. CKAPhA (California Korean-American Pharmacists Association) 는 내가 학교에서 한국 학생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 도움을 많이 주신 고마운 단체인데, 일 년에 한 번씩 소셜 이벤트로 학생들과 약사님들을 한 자리에 초대하여 서로 만나고 친목을 쌓게끔 하는 이벤트가 있다. 사실 우리 학교에선 로테이션을 다른 학교들보다 조금 빨리 시작하는 편이라 3학년이 되면 벌써 이런 이벤트에 잘 안 가기도 하고 그러는데, 난 왠지 전 회장으로서 꼭 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껴 진작부터 이벤트에 가겠다고 말해놓은 터였다. (그런데 그땐 걷기 대회랑 같은 날인 줄 몰랐었지 ...)
고급 레스토랑을 빌려 진행된 이번 스프링 믹서 이벤트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약사님들과 라운드 테이블 시간(서로의 테이블을 돌며 이야기 나누고, 약사님들의 경험과 조언을 듣는 시간)을 가진 뒤 집에 오니 거진 밤 10시였다.
집에 오자마자 아기 우는 소리에 놀라 방으로 올라가 보니 남편이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혼자 애를 쓰고 있었다. 아마 아기가 잠들 때 내가 없어서 아기가 깊게 잠들지 못했던 것 같다. (평소에 내가 아기를 재우는데, 내가 늦게 오거나 해서 다른 사람 손에 잠든 날에는 십중팔구 자지러지게 울면서 10시-11시쯤 깨곤 한다.) 특히나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낯선 사람들 얼굴을 봐온 터라 저녁에 잠들기 전쯤 아기가 울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막상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꺼억꺼억 우는 아기를 보니 너무 안쓰러웠다.
내 품에 안긴 채 울음을 그친 아기는 곧 천천히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아침 걷기 이벤트로 왕복 60 마일, 저녁에 라운드 테이블 이벤트로 왕복 100 마일을 운전 한 피곤하고 피로한 날이었다!
(160 마일 ≈ 260 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