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봄방학에 결혼했다
각자의 집에서 30 마일 정도 떨어진 한 도시에 있는 레스토랑을 빌리고, 우리 둘을 포함해 딱 50명 -- 가족, 가까운 친구, 하객들을 모시고, 오후 4시부터 밤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규모는 작지만 시간상으로는 할거 다 한, 그런 결혼식을 했다.
2014년 5월 프로포즈를 받고, 6월에 집에서 "약혼 기념사진"들을 찍고 난 후에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전문 사진기사도 아닌, 시어머니께서 손수 사진을 찍어주셨다.)
우리가 결혼할 때 남편과 나는 둘 다 학부생이었는데, 결혼 3일 전까지 중간고사 공부를 하느라 결혼 생각은 토요일이 되어서야 슬슬 실감이 났던 기억이 난다.
우리 결혼식에 오려고 캐나다에서부터 와준 친척 언니와 함께, 결혼 하루 전이되어서야 막판 쇼핑을 몰아하며 테이블에 놓을 장식, 남편과 나 우리 둘이 어렸을 때의 사진들을 넣을 액자, 오시는 손님들께 받을 "지문 나무" 배경 종이 등을 사러 돌아다녔었다.
우리 결혼식은 작은 결혼식이었다. 머리랑 화장도 결혼하는 날 아침 여동생 둘이 붙어서 해줬다. 식장 세팅도 나와 가족들이 직접 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식장으로 갈 때도 웨딩드레스보다 조금 간소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선 직접 운전해서 갔다.
여차저차 식이 다 끝나고 나선, 이제 부모님과 같이 살던 집으로 가지 않고 남편과 시가족이 사시는 집으로 또 혼자 운전해서 갔다. (남편도 자기 집에서 직접 운전해서 왔던 터라 식장에는 남편과 나 사이에 차가 두 대 였다. 결혼식 후 각자 운전해서 집으로 가 만나야 했던 것.)
봄방학은 1주일이었는데, 그동안 우리는 "신혼여행 대신"으로 생각해뒀던 카탈리나 섬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술을 잘 못하는 내가 진한 칵테일 한잔 먹고 뻗어서 섬 문 닫을 때까지 못 일어났던 건 안 비밀. (새 신랑 미안!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었을 것 같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카탈리나 섬에서 찍어온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다는 것.)
남편은 알아본 좋은 레스토랑이 있다며 나를 데려갔고, 이름처럼 높은 언덕 위에 있는 그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원래 추위를 잘 타는 성격이라 나는 실내 테이블에서 먹고 싶었는데, 남편이 밖에 나가서 먹어보자고 해서 마지못해 따라 나갔었다. 그런데 웬걸. 미리 사전조사 다 해놓고 왔던 남편은 이 레스토랑이 내려다보이는 야경 좋기로 유명하단 걸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값비싼 "진짜" 스테이크를 먹은 뒤, 옆에 있는 난로 기둥 덕분에 많이 추워하지도 않으며 우리 둘은 오손도손 얘기를 나눴다. 우리가 결혼기념일 저녁을 먹으러 왔다는 걸 알아챈 웨이터의 센스로 "Happy Anniverssary!" 라고 접시에 데코 된 디저트를 먹으며 우리의 첫 결혼기념일이 행복하게 지나갔다.
약대에 들어온 지 2년 차, 2월과 3월에 들은 과목의 기말고사를 마치고 (망치고) 봄방학 동안 정신 요양을 하는 와중이었다. 임신 중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학교 공부 따라가기가 많이 힘들다 느끼고 있었던 참이었다. 기분 전환 겸, 결혼기념일 셀 겸, 남편이 밖에 나가자고 했다.
남편이 운전하는 동안 최종 성적이 떴다고 알림이 와서 확인을 해 보는데. 아뿔싸, 약대 들어와 두 번째 C를 받은 날이었다. (임신 3개월 차에 들었던 "심장 질환" 수업과 임신 8개월 차에 들었던 "정신 질환" 수업에서 C를 받았다.) 무슨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우울해. 속상해하는 나를 달래며 남편이 차를 멈춘 곳은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도시,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역이었다.
뭐지? 저녁 먹으러 나온 줄 알았는데 웬 주거지역? 뭔가 유명한 요리사가 자기 집에서 비밀 레스토랑 운영이라도 하나? 싶어서 (말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남편에게 물어봤더니, 또 그렇다고 한다. 응?
남편과 차에서 내려서 어디론가 걸어가는데, 뭔가 저 앞에 반 친구 둘이서 지나간 것 같았다. 여기가 학교 근처라 저 친구들도 여기 사나?
결국 도착한 어느 집 앞.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
반 친구들이랑 남편이랑 진작부터 내겐 비밀로 하고 1-2달 후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 베이비 샤워를 준비했었던 것이다.
손재주 좋고, 마음씨는 더 좋은 착한 반 친구들 덕분에 두 번째 결혼기념일은 정말 특별한 날이 되어 마음에 남았다. 정신 질환 수업이 밑도 끝도 없이 당황스러워서 다들 공부하느라 바빴을 텐데 (새로 오신 교수님의 첫 수업이었던지라, 교수님도 학생들도 학기 내내 긴장했던 수업이었다), 언제들 이렇게 준비했던 걸까.
이 날엔 20명 남짓한 친구들이 있었지만, 듣기론 120명 반 친구들 중 오고 싶어도 못 온 친구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집을 오픈 한 친구의 집주인이 법적으로 허용 가능한 최대 인원수를 맞추라고 특별 지시했었다고.) 친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제 애기 태어나면 이모랑 삼촌들 120명 저절로 생기는 거야"라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로테이션 시작하기 전, 아직 우리가 모두 학교에 같이 다니고 있을 때, 친구들은 시시때때로 아기 옷, 아기 인형, 아기 책, 아기 기저귀 등을 내게 선물로 주며 "아기한테 내가 안부인사했다고 전해 줘!"라고 이모 노릇 삼촌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다.
사실 결혼기념일 나흘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나 우리 둘 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만약 시간이 난다면 우리는 다가올 아기 돌잔치 준비 얘기를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지 (그렇다고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두둥), 막상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코앞이라는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기념일이 주중이기도 했고, 여자 저차 결혼기념일은 주말에 세기로 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것도 안 하면 서운하다 싶어서 결혼기념일 날에 로테이션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망고 케익을 하나 사들고 집에 가서 온 가족들이랑 나눠먹었다.
"난 케익 사 왔는데, 넌 아무것도 없어? 꽃 같은 거라도?"하고 남편에게 장난으로 물어봤다 (과연 100% 장난뿐이었을까).
"꽃? 진심?"하며 되받아치는 남편. 그래, 연애 기간 내내 또 결혼하고 나서도 꽃 선물은 절대 하지 말자고 누누이 말해왔던 나였다. 며칠 못 가서 시들시들 해지면 그걸 또 버리는 것도 꽃에게 미안하고, 안 버리는 것도 짐이 되어서 싫고,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꽃 선물은 하지 말자는 무한 실용주의적 발언이었다. 근데 왠지 오늘 같은 날은 평소에 별로 안 좋아하던 꽃 선물이라도 괜히 받고 싶은걸.
그 다음날 아침까지 서운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난 그래도 케익이라도 사 왔는데 남편은 정말 아무것도 안 했네? 아무리 주말에 세기로 했어도 그렇지, 아직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결혼기념일인데, 어떻게 진짜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있지?
로테이션 가는 길, 괜히 엄마한테 전화해서 속상한 이야기 하면서 눈물을 찔끔 뺐다.
엄마는 주말에 같이 세기로 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보라고 그러셨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토요일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걷기 대회, 약사님들과의 저녁), 일요일이 되어서 우리는 나갈 채비를 슬슬 했다.
우리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고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께서 오후 일찍부터 일부러 아기를 데리고 나가주셨고, 우린 아기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끼는 "아기 없이 나갈 준비 하는" 허전함과 함께 오늘 뭘 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아기가 태어나고서 5개월 정도 있다가 우리 둘의 생일 즈음에 저녁 먹으러 한번, 또 아기 생후 8개월 정도 되었을 때 영화 한 편 보러 한번 나간 적은 있었다. 그래도 다른 날들엔 아기가 집에 있는 상태로 나갈 준비를 하느라 신경이 쓰였었는데, 막상 아기 없이 우리 둘만 나갈 준비 하다 보니 뭔가 말할 수 없는 그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다. ㅋㅋㅋ 볼링을 치러 갈까? 페인트 나이트 (저녁 먹으며 와인 마시고 그림 그리고 하는 것? 같은데 나도 아직 한 번도 안 가봐서 자세히 모르겠다)에 가볼까? 여러 의견은 나왔지만,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좋은 저녁 먹고, 소화시킬 겸 근처 아웃렛을 걸어 다니기로 했다.
AYCE (all you can eat -- 일정 금액 내고 무제한으로 먹는) 스시 집에 가서 실-컷 저녁 먹고, 근처 아웃렛 가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각자 신발, 시계 등 사고 싶은 물건들은 있었지만 막상 자기들 물건을 사지는 못했다는 것. 두 시간 여를 돌아다닌 끝에 우리가 산 물건은 다름 아닌 아기 장난감이었다. 나름 아기의 개월 수와 흥미를 고려해 신중하게 고른, 바나나 자동차를 탄 원숭이 장난감이었다.
저번에 이 아웃렛에 왔을 때, 자세히는 못 돌아보고 그냥 가볍게 들렸던 토리버치 (Tory Burch) 상점에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폐장 분위기였다. 아직도 구경하는 손님들 앞에서 대놓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직원들이 뭔가 가게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저녁 7시 40분이었다. 알고 보니 일요일에 이 아웃렛은 8시에 닫는다고 한다.
결국 우리 물건은 하나도 못 사나 싶었는데도 별로 아쉬운 느낌도 없었다. 그냥 남편이랑 손잡고 오랜만에 둘이서만 걷는 게 좋았다.
그러다가 막판에 예쁜 신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 알려줬다). 신어보라고 하고, 내가 맘에 든다고 하니까 사준다고 그랬다 (엉엉 날 가져요). 룰루랄라 기분이 좋아서 계산하는 남편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좋다~ 하고서 가게 문을 나가려는 찰나에 앵무새가 그려진 귀여운 지갑 하나가 보였다.
"어? 왜 이걸 진작 못 봤지? 이거 귀엽다 그치" 하면서 가게를 나서려고 몸을 트는데, 남편이 "맘에 들면 사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 이싸람 ... <3)
"응? 근데 이거 완전 충동구매잖아 ㅋㅋㅋ 신발 샀는데 이거까지 또 사?" 했더니 빙긋 웃으며 남편 왈.
"우리 결혼기념일 이잖아."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이게 뭐 거창한 말도 아닌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콧물)이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그치 우리 결혼기념일이지. 그냥 뭔가 바쁜 거 없이도 바쁘게만 살아왔던 거 같은데, 특히 아기가 태어나고선 눈코 뜰 새 없이 뭔가 바쁘고 몸이 힘들어도 그냥 육아가 이런 거이려니 하고 나름 열심히 엄마로서의 삶에 적응하려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그 아기의 아빠, 나의 남편이 예전 연애시절의 느낌 물씬 나는 말을 저렇게 예쁘게 해 주는데 감동을 안 할 수가 있나.
결국 다시 계산대로 쫄래쫄래 돌아가서 ("우리 2초 전에 여기 왔었는데 또 왔네요" 하고 신났던 나) 계산을 또 하고, 그렇게 아기 장난감, 내 신발과 지갑 들로 무거워진 쇼핑백을 들고 우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8시 반쯤 도착했는데 아기는 아직 안 자고 있었다.
아기를 봐주신 시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아기를 데리고 우리 방으로 올라가 아기를 같이 재웠다.
그렇게 세 번째 결혼기념일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