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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군 Apr 06. 2018

시어머니가 설거지 마무리를 안 하신 이유

야매 엄마 어디 안 가지

"Mentirosa! (거짓말쟁이!)"

로테이션 과제한답시고 스타벅스에 아침부터 나가 있다가 가족들 저녁 시간 때 즈음 집에 오자마자 시어머니께 들은 말이다. 과제는 한 3시쯤 끝냈었는데, 애기 분유가 떨어져 가서 집 근처 마트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마트에도 분유가 다 떨어지고 없었다는 것. 내일이나 내일모레쯤은 꼭 사야하는데 ...). 일이 일찍 끝나 집에 와있던 남편이, 아기가 거실에서 방금 잠들었다고 나에게 손짓으로 알려주던 찰나였다.

지나가던 (?) 시어머니께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뜬금없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시길래 난 또 시어머니가 내게 장난치시는 줄 알았는데 (평소에도 친딸처럼 대해주시며 날 놀리시곤 한다. 특히 아기 낳고서 생긴 내 뱃살 보고 자주 놀리신다ㅠㅠ 흑흑 ...) 알고 보니 아침에 시어머니와 내가 한 대화에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학교에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아무 때나 스타벅스에 가서 몇 시간 동안 할 일만 끝내고 오면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느지막이 9시 반 즈음해서 나갔었다.

나가기 전에 시어머니랑 거실에 아기를 두고 앉아서 얘기를 조금 나눴는데, 오늘 아침에도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밖에서 운동을 조금 하고 오신 모양이었다. 내가 나가기 전, 9시쯤 해서 벌써 샤워를 다 하시고 내려오신 상태였다.

내일은 교수님 만나러 학교에 가는 날이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가는 시간을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8시에 나가서 학교에 9시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그래도 내일은 교수님이 다른 일정이 많으셔서 나와의 미팅은 일찍 끝내주실 것 같고 그래서 내가 12시 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시어머니는 내가 12시 전에 온다고 한 게 내일 일을 얘기한 게 아니라 오늘 일정 얘기한 것으로 이해하신 것이었다. 이 모든 오해의 원인은 나의 허접한 스페인어 때문이었다. ㅠㅠ


3년 전 결혼해서 시댁에 들어와 살면서,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생각은 (혹은 생각만?)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막상 가족들이 다 영어를 알아들으시니 굳이 잘 하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초등학생처럼 (아니 ... 유치원생처럼?) 말하며 배우고 직접 연습할 용기가 부족했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영어를 알아들으시지만 스페인어를 쓰시고, 나는 시어머니의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만 (50-70% 정도) 영어로 말하고 그래 왔었다. 그래서 시어머니랑 내가 대화할 때는 서로 다른 언어로 듣고 말하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곤 했었다. 그래도 올해 초 시가족 따라 친척분들께 처음 인사드리러 멕시코에 갔다 온 뒤, "나의 왕초보 스페인어도 말이 통하긴 통하는구나!" 하고 어설프게 깨닫고 와서는 시어머니와도 가끔씩 스페인어로 말하려 노력 해왔었는데, 오늘도 그렇게 시도했던 것이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다.


가족들은 저녁을 다 먹은 상태라 시어머니께서 막 설거지를 시작하셨는데, 그 옆에 가서 오늘 나 기다리셨냐고, 미안하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리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냥 말이 그랬다는 거라고 그러신다. 12시 전에 온다는 게 오늘 얘기를 한 게 아니라 내일 얘기였다고 말씀드리니 "아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보다. 괜찮아!" 해주시는 쿨한 시어머니. (그게 아니라 제가 잘못 말한 거란 거 알아요 ... ㅠㅠㅠ)


남편이 지나가면서 "저녁 안 먹었으면 지금 빨리 먹지 그래?" 그러길래 나도 마침 배고픈 터였고, 그래서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국을 끓여두신 시어머니. (가족들은 이 국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난 따뜻하고 맛있어서 참 좋아한다. 닭고기랑 야채들을 듬뿍듬뿍 넣어서 맑게 끓이신 야채 닭고기 국?)

내가 밥을 먹는 동안 시어머니는 설거지를 다 끝내셨고, 그래서 나는 내 설거지라도 하려고 싱크대에 갔는데. 이게 웬걸, 싱크대 높이의 반 이상으로 비눗물과 음식물들이 섞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싱크대 옆에 있는 버튼 하나 누르면 안에 막힌 것이 드르륵 갈리며 음식물과 물들이 다시 휙 빠지게 하는 믹서기(?) 날 같은 장치가 하수구에 있는데, 그걸 작동 안 시키신 것 같았다.


그 장치가 고장 났나? 아니면 뭔가 씻기 힘든 큰 그릇이 있어서 물을 잔뜩 부어놓으신 건가? 아니면, 혹시 늦게 들어온 내가 미워서 이렇게 놔두신 건가?!!

별에 별 생각 다 하면서 이걸 어쩌나, 하면서도 내 그릇을 닦으려고 고무장갑을 주섬주섬 끼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옆에 딱 지나가셨다. 그래서 여쭤봤다. "이거 버튼 눌러서 작동시켜야겠죠?"


시어머니가 웃으며 아니라고 하셨다.

버튼 누르면 그 믹서기 같은 날이 돌아가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낼 텐데, 그럼 거실에서 자고 있는 아기가 깰 거라고.

아차 싶었다. 아기 엄마는 나인데 과연 나는 아기 엄마 자격이 있는 엄마인 것인가. ㅠㅠ

아기가 거실에서 자고 있다는 거 남편이 진작 말해줘서 알고 있었지만, 음식물 분쇄기의 소음과 아기의 잠을 연결하진 못했던 것이다.

(보통 가벼운 소리 내면서 금세 음식물을 분쇄하고는 하지만, 간혹 가다가 우당탕 무서운 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아기가 낮잠을 자다가 우당탕 하는 소리에 놀라서 깬 적이 있다고 부연 설명해 주셨다.)


아기 엄마인 나보다도 아기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시는 시어머니.

임신 중에 학교 다니면서, 또 애기 낳고 학교 다니면서 힘들지 않냐고 친구들이 모두 물어보곤 했는데, 우리 시어머니 아니었음 난 학교 쉬지 않고 다니지도 못했을 거다.


지난 1월 말 학교 캠퍼스에서 듣는 수업이 다 끝나고, 2월 중순 로테이션을 시작하기 전.

시어머니께 작은 선물과 편지를 드린 적이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학교 수업 과정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건 다 아기 돌봐주시며 내게 공부할 수 있게 지원해주시는 시어머니 덕분이라고.

잘 못하는 스페인어이지만 구글 번역기로 한 단어 한 단어 찾아가며 짧은 편지를 썼었는데, 편지를 읽고 시어머니가 잠깐 눈시울이 붉어지셨었다.


오늘 내가 당신의 예상보다 늦게 들어와서 그런지 아기를 보는 데 조금 힘들었다고 하시며 일찍 주무시러 들어가신 시어머니. (요즘 이가 나고 있어서 그런지 아기가 많이 칭얼거리기는 한다.)

시댁에 얹혀살면서 집안일 하나 제대로 하는 거 없이 그나마 설거지만 (어쩌다 한 번씩) 하는 며느리가 얄밉지는 않으실지, 나 같으면 이런 며느리랑 같이 살기 싫을 거 같다는 생각 들면서도, 또 우리 시어머니니까 착하게 다 이해해주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에 무한히 감사드린다.


+ 제목 부분 배경 사진 출처는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나온 여기

+ 조회수가 29만이 넘었다고 하자 남편이 이 포스트 내용을 궁금해 해서, 영어로 다시 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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