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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군 Apr 20. 2018

11개월, 아기가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엄마 눈치 보면서도 하고 싶은 거는 다 하는 아기

아기가 태어나기 전, 나는 잠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나를 20년 넘게 봐오신 엄마조차도 "너의 최대 약점은 잠이다, 잠"이라고 인정하실 정도로 잠을 충분히 자고 못 자고에 따라 나의 하루 컨디션과 일의 역량은 차이가 많이 났다.


대학교 시절, 차 사고로 차를 폐차하고 나서 학교에 갈 방법이 없던(!) 내게 친절히 운전기사를 자청해주었었던 그 당시 남자 친구이자 지금의 남편은,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는 우리 집에서 자곤 했었다.

거실의 소파에서 혼자 자다가 일찌감치 깨서 학교 갈 준비를 하던 남편은 우리 엄마가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던 모습이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늘 내 이름을 부르시며 날 깨우시곤 했는데, 남편은 하루 종일 내 이름을 엄마 말투로 부르며 나를 놀리곤 했었다.

(남편이 처음으로 배운 한국말은 "배고파," 그다음으로 배운 한국말은 "선미야, 일어나!"였던 것 같다.)


아기가 태어나고 2주간, 난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을 피곤에 쩔어 살았었다.

그 작은 아기가 어찌도 그리 정확히 시간을 아는지, 매 2시간마다 모유를 찾는 아기 덕분에(때문에!) 난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낮잠을 잘 새도 없이 그렇게 2주를 내리 비몽사몽 한 상태로 지냈다.

산후우울증까지 겹쳐서 (어쩌면 그냥 잠이 부족해서 짜증이 쌓이고 쌓인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는 일이 잦았었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 모유와 분유를 혼합으로 먹이고, 또 결국엔 분유만 먹이게 되면서 나의 숨통(혹은 "잠"통?)이 조금 트일 수 있었다.


그런데 아기를 키우며 내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뭐 난 아직도 잠이 많긴 하고, 가끔씩 다른 가족들이 아기와 돌아가며 놀아주시기도 하는 주말엔 3시간짜리 "낮잠"을 자기도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이제 매일 아침 알람 없이도 제법 눈이 번쩍 뜨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아기이다.



아기는 언제부턴가 통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생후 3주 정도부터 제법 규칙적인 시간에 잠들고 잠이 깨기 시작했었다. 그래도 밤중에 두어 번 일어나 분유를 먹고 다시 자곤 하던 아기가 한 8개월 정도부턴 거의 중간에 깨는 일 없이 한 번에 쭉 잘 잔다! 엄마인 나를 닮아서 잠이 좋은가 보다.) 또 신기한 게 아침 7시쯤이 되면 슬슬 일어나려고 움직이고, 끄응 끄응 혼자서 소리를 내다가 7시 30분쯤 거짓말처럼 반짝! 하고 눈을 뜬다는 것이다.

눈만 뜬다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지. 자기 팔과 다리에 힘이 좀 생긴 이후로는 아기 침대에서 실컷 자다가 7시 30분에 벌떡 침대 벽을 잡고 일어나(!) 내가 자는 침대 쪽을 보며 뭐라 뭐라 소리 낸다. 그러면 난 잠결에 살짝 뜬 눈 사이로 (벽을 잡고) 혼자 일어서 있는 아기를 보고 다시 잠이 들려다가도, 다시 정신 차리고는 곧장 눈이 번쩍 떠진다.

내가 전날 밤 조금 늦게 자거나 해서 아침에 한 번에 못 일어나면, 아기는 자기 침대에 있는 인형들을 잡고 내 쪽으로 던지기도(!) 한다.


근데 내가 로테이션 가려고 준비할 시간에 아기가 깨어 있는 게 은근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나마 학교 다닐 적엔 아기가 일어나기 전 6:30-7시쯤에 내가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기에게 덜 미안했었다. 그런데 로테이션 시작하고 나선 아직까지 그렇게 일찍 나오라고 한 프리셉터들이 없었고, 그래서 아침도 먹고 느긋하게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면 깨어있는 아기를 두고 나와야 할 때가 많았다. 거의 매일매일이 그러했다.

그래도 "엄마 갔다 올게, 안녕!" 하고 내가 먼저 돌아서면 자기는 할머니 품에 안겨서 그래도 웃으며 놀거나 하던 아기였는데, 지난주 화요일 나의 "안녕!" 인사에 아기가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진짜로 내 인사를 알아듣고서 운 건지, 아니면 그냥 어쩌다가 우는 타이밍이 맞았던 건지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날 마음이 참 많이 짠 했었다. 아기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그래도 말귀도 조금씩 알아듣고 잘 크고 있구나.


아기 옹알이 소리도 제법 사람(?) 말소리처럼 높낮이가 생겼다. 아기는 "난난나나나나" "맘마맘마마" 등의 음절을 반복하며 다른 사람들과 말로 소통할 연습을 매일매일 열심히 한다.

손가락으로 물건이나 가고 싶은 곳을 가리키기도 하고, 기분이 좋으면 "꺅!" 소리 지르고 화가 나거나 심술이 났을땐 뚱한 표정도 지으며 그렇게 조금씩 어른들 흉내를 내고 소통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 아기가 정말 벌써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하고 문득 깨달았던 계기가 있다.

남편과 내가 처음으로 아기를 위해 사온 장난감이 하나 있다. 상자 안에 10개의 색색깔의 블럭들이 들어있는 장난감이다. 이 블럭들은 또 각기 다른 모양인데, 상자 뚜껑에 이 블럭들이 딱 맞게 지나갈 수 있는 5개 구멍들이 있다.

아기가 6개월 무렵에 이 장난감을 사 왔던 것 같다. 아기는 블럭들을 한 손에 한 개씩 들고 부딪치며 소리 내기를 좋아했는데, 상자 뚜껑에 있는 구멍에는 관심도 없었다.


문제의(?) 장난감


그러다가 며칠 전. 여러 모양 중에 동그라미 블럭을 가지고 놀던 아기가 우연히 동그라미 구멍에 블럭을 통과시켰다.

옆에서 보던 시어머니도 나도 그 모습에 너무 들떠서 좋아라 박수를 막 쳐줬다. 아기도 그게 잘한 일인 줄 알았는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만세를 했다. 그러고선 또 다른 모양 블럭을 잡고 그 동그라미 구멍에 넣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별 모양을 동그라미 구멍에 집어넣으면 들어갈 리가 없지!)

그 모습이 귀여워서 별 모양 구멍을 가리키며 "아기야 여기다가 해야지, 여기!" 했지만 아기는 엄마의 고난이도 "사람말"을 아직 못 알아듣는 눈치다.


그때였다. 아기가 별 모양을 동그라미 구멍 위에서 쾅쾅 힘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다가 딱 멈췄다.

그러고서 아기는 상자 뚜껑을 열고는 -_-; 별 모양 블럭을 상자 안에 집어넣고 다시 뚜껑을 (어설프게나마) 닫는 것이 아닌가. 으아니, 11개월 아기가 벌써 잔머리를 굴리다니!




아기 잔머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즘 윗니 2개, 아랫니 2개가 한꺼번에 나고 있어서 아기가 많이 간지러워한다.

근데 이 아기가 깨물기 좋아하는 것은 아기용 바나나 칫솔도 아니요 20불 주고 엄마가 특별히 아마존에서 산 프랑스산 고무 인형도 아니었다.

그나마 바나나 칫솔은 하루 한번 아기용 치약 짜서 주면 좋아라 하고 물고 놀기는 한다. 기린 인형은 완전히 아웃오브안중 이지만.

아기의 근질근질한 잇몸을 위해 아기가 좋아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엄마의 핸드폰 (그리고 실리콘 커버).

근데 핸드폰이 항균 작용하면서 아기의 건강을 신경 써주는 착한 물건이 아닌지라 (오히려 그 반대로, 엄마 따라서 화장실, 길바닥, 차에 있는 거치대 등 온갖 더러운 곳들을 골라서 가는 물건이 아닌가!) 아기가 핸드폰을 깨물려고 할 때마다 확실하게 "아기야, 안돼! No! 그거 먹는 거 아니야!"라고 알려주고선 아기 손에서 뺏곤 했다.

그런데 이 아기, 보통내기가 아니다.


언젠가 한 번은 유투브로 아기가 좋아하는 동영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또 그 와중에 핸드폰을 깨물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동영상은 스패니쉬로 된 아기 노래인데, 언젠가 번역해서 브런치에 올려보겠노라고 벼르고 벼르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또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아닌 거 알면서 왜 먹으려 그래~"라고 큰소리로 알려주며 안된다고 확실히 말해줬는데 (아기가 말귀를 알아듣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아기, 내게 등을 지고 돌아 앉으면서 고개를 천천히 숙이는 것이 아닌가.

손에 있는 핸드폰도 같이 천천히 내려가나 싶었는데, 아기의 앞쪽으로 가서 본 광경에 기가 막혔다.

아주 천천히, 핸드폰 잡은 손과 고개를 내리나 싶더니, 이 아기 입도 아주 천천히 벌리며 핸드폰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ㅋㅋㅋ


"아기야!"

아기 이름을 부르니 화들짝 놀라서 나를 말똥말똥 쳐다본다.

결국 아기는 엄마에게 핸드폰을 뺏기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동영상을 마저 다 봤야 했다는 후문.




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아기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에 시간이 조금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덧 다음 달이면 아기 돌잔치도 해야 하고! (어디 안 가는 이 야매 엄마는 아직 본격적으로 돌잔치 준비 시작도 안 했다. ㅋㅋ)

그래도 아기랑 이제 말이 조금은 통하는 것 같아서 새삼 신기하다.

이 아기가 본격적으로 말하고 자기 생각을 수월하게 표현하게 된다면, 그때 우린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으려나?

벌써부터 기대가 잔뜩 되는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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