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 된 이야기. 15단계로 나눠서 적어봤다.
1.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해가 무척 강하다. 2008년에 미국 오자마자 고모가 데려가신 큰 마켓에서 동생들과 내가 쓸 선글라스들을 하나씩 장만했던 기억이 난다. 하나에 10-15불정도 했던것 같다. 그런데 막상 어디 나갈 떄 거의 안쓰고 다녔었다. 고등학교 수업이 아침 일찍 시작이었고, 또 수업 끝나고는 학교나 근처 대학교 도서관 가서 밤까지 공부하고 그랬어서 해가 쨍쨍한 낮에 어디 돌아다닐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처음 샀던 선글라스는 집안 구석 서랍 어딘가에 박혀 몇년동안 빛을 못봤다. 몇년이 지나서 다시 꺼내보니 선글라스 표면의 코팅 필름이 다 금이 간 상태였다 (마치 고무를 오래 안쓰고 놔두면 금이 가고 갈라지는 것처럼).
2. 나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차로 6-7시간정도 거리에 있는 먼 도시에 있는 대학교를 다녔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하고도 장거리 연애를 했었던 것이다. 2014년 5월에 드디어 졸업을 하는데, 졸업식에 참석하러 (지금 남편인 그 당시) 남자친구와 (지금 시아버지인 그 당시) 남자친구의 아버지의 주도로 남자친구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큰 벤 한대를 빌려 다같이 올라왔다. 그 먼 도시로 두 가족이 다 같이 올라오는 길에 중간 중간 두어 번 멈춰서 먹을 것과 마실 것 사고, 화장실 들리고 했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그 휴식 시간에 남자친구의 아버지 (지금의 시아버지) 께서 선글라스 낀채로 담배를 피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라고 그러셨다. 꼭 영화배우의 모습 같다며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멋있으시다고 그러셨다.
3. 한국에 있을때 초록색 테, 동그란 알의 선글라스가 있었는데, 내가 그거 쓸때마다 동생들이 오리같다고 (?) 놀렸다. 이 오리 얘기도 있고, 또 내 광대뼈에 웬만한 선글라스는 알이 걸리적 거리는 (?) 터라 미국 와서도 선글라스를 잘 안썼었다. 그러다가 2017년 12월엔가, 정말 맘에 딱 드는 선글라스 하나를 찾았었다. 근데 가격이 좀 비쌌다. 그래도 이 때가 아기 태어나고서 몇개월 안되었을 때 이기도 했고, 나를 위한 선물을 내 스스로 해주고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냥 사고 보기로 했다. 혹시 사놓고 안쓰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그 정 반대로 열심히 (?) 잘 쓰고 다녔었다.
4. 3번에서 말한 그 선글라스는 2018년 2월에 멕시코 놀러 갈때도 고이 가지고 가서 잘 썼다는 걸, 잊고있었지만 며칠 전 멕시코에서의 사진을 찾아보다가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뒤늦은 후회이지만, 2018년 10월에 한국 갔었을때도 가지고 갔어야 했던 것이다 ... 한국의 해는 여기만큼 뜨겁지 않으니까. 만약에 가져갔다가 잃어버리면 슬플테니까. 게다가 한국은 지금 겨울이니까. 하고서 안가져 갔었다. 내 차 백미러 근처에 있는 선글라스 보관함에 고이 넣어두었다가 한국 갔다와서 다시 찾아 쓸 생각이었었다.
5. 2018년 11월, 한국에 갔다 온 뒤, 내 차 운전을 하다가 선글라스가 필요해서 선글라스 보관함을 열어봤다. 어? 비어있네? 내가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남편의 형제들 중 하나가 차를 사용했던 모양이었다. 운전하다가 내 선글라스를 썼고, 그걸 집으로 그대로 가져간 것 같았다. 그래 괜찮아 집에 어디라도 있으면 된거니까! 마인드 컨트롤 ... 흥분하지 말고 집에 가서 선글라스를 찾아보자.
6. 집에 내 선글라스가 있었다. 2017년 12월에 내가 살까말까 망설였던 그 선글라스. 다른 선글라스들처럼 내 광대 건드리는 일 없이, 쓰면 딱 내것인 바로 그 선글라스! 그런데 그 선글라스가 거실에 있는 프린터기 위에 있다. 드든. 프린터기 위에 있는 선글라스들은 시아버지의 선글라스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시아버지가 내 선글라스를 쓰신다는 얘기였다. 한국에 나가있는 3주동안, 남편의 형제들이 내 차를 썼고, 내 선글라스를 집으로 가져와놓고선 그 이후로 잊어버렸을 것이 뻔했다. 시아버지께서 주인 없이 굴러다니는 선글라스를 보셨을테고, 아무도 자기 선글라스라고 안하니 (나는 한국에 있었으니까!!!) 나의 갸륵한 선글라스는 시아버지의 선글라스 콜렉션에 추가된 것 ... 이라고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다.
7. 상상은 현실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가족들이 스시 집으로 외식을 하러 가는데 시아버지가 나의 그 선글라스를 딱 쓰셨다. "선글라스 잘 어울려요!"라고 말씀 드렸다. 잘 어울리시긴 했다. 하지만 난 속으로 흑흑 울고 있었다. 남편은 상황을 알아채고 뒤에서 남편 미소(?)를 지었다. 시아버지께선 당신께서도 이 선글라스가 다른 선글라스들보다 특히 좋다고 그러셨다. 가벼우면서도 디자인이 좋다고 ... 그리고 이건 말로만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한국 갔다오기 전) 내가 기억하는 시아버지는 매일 다른 선글라스를 쓰시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시아버지께서는 일주일에 최소 5번 이상은 이 선글라스를 쓰시는 것이었다!
8. 몇일 뒤, 남편이 아울렛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내 선물이라면서 뭘 사가지고 왔다. 같은 브랜드의, 하지만 다른 디자인의 선글라스였다. 남편이 고마웠는데 그래도 난 내 선글라스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 근데 시아버지가 워낙 해주신게 많아서, 선글라스 하나 돌려달라고 말씀 드리기가 괜히 죄송스러웠다. (까놓고 말해서 "내차"라고 위에서 불러온 그 차도 사실은 시아버지가 결혼 즈음에 사주신 차이고 ...) 하지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9. 때는 작년 크리스마스. 시가족들 선물 고민을 하던 차, 남편의 형으로부터 올 해 남편네 가족은 "씨크릿 산타" 방식으로 선물을 주고받자는 제안이 나왔고 다들 그러자고 했다. 씨크릿 산타는 제비뽑기로 각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뽑아서 걸린 사람 한 사람에게만 좋은 선물 하나를 딱 사주는 방식이다. 예를들어, 가족 6명에게 자잘하게 10불짜리 선물을 하나씩 사주는 것 보다, 한사람에게 60불짜리 선물을 크고 강력ㅋ하게 뙇! 주는것. 보통 선물 금액 한도를 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할렐루야! 내가 뽑은 제비뽑기 종이에는 시아버지 이름이 딱 적혀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100% 순도 내 취향으로만 골랐던 그, 나의 선글라스를 시아버지가 좋아하셨으니,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서 내 취향대로, 거기에다가 시아버지를 위한 마음을 듬뿍 담아 다른 선글라스를 선물해 드리면, 혹시 이 새로운 선글라스를 더 좋아라 하지 않으실까? (다른 마음은 없어 ... 그냥 며느리가 시아버지 생각하는 마음일뿐이라구! 내 선글라스 ...)
10. 씨크릿 산타 제비를 뽑고 난 바로 다음 날, 나는 당장 아울렛으로 가 시아버지의 선물을 샀다. 다른 가족들이 선물 금액 한도를 정하기도 전이었다. 내 취향을 적극 반영, 하지만 시아버지를 위한 마음을 가득 담아 꽤 괜찮은 선글라스를 골랐다. 선물을 사온 뒤, 선글라스가 담겨져있는 그 가방을 내 책상 한켠에 잘 숨겨두고,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기까지 조용히 기다리려고 했다 ... 하지만!
11. 크리스마스가 오기도 전에 나는 남편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씨크릿 산타"의 묘미는 말 그대로 누가 누구를 뽑았는지, 또 무슨 선물을 샀는지를 비밀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내가 시아버지를 위해 선글라스를 샀다는 것을 밝혀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이 나의 씨크릿 산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ㅋㅋㅋ 이왕 알게 된 거, 내가 원하는 선물을 일러줬다. ㅋㅋㅋ
12. 드디어 대망의 크리스마스 이브. 어렸을때부터 자칭 타칭 "장 포장"인 나는 남편과 남편 형제들의 선물 포장을 도왔다. (내 성이 "장," 포장을 잘해서 이름이 "포장.") 포장한 선물들을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 쌓아놓고, 저녁을 먹고나서 선물들을 열어봤다. 시아버지께서 내 선물을 보고 좋아하셨다!
13. 그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인가, 시아버지께서 내가 선물로 드린 선글라스를 쓰셨다. 고르고 골랐던 그 선글라스는 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시아버지께 정말 잘 어울렸다. 내가 "Nice sunglasses! (멋진 선글라스네요!)"하니 "I know, right? (내말이, 그치?)"라고 받아쳐주셨다.
14. 그런데 왠일인지 그날 이후로 시아버지께서는 새 선글라스는 거의 쓰지 않으셨다. 아니, 다른 어떤 선글라스도 거의 쓰지 않으셨다. 나의 그 선글라스만 빼고 ... 매일매일 일을 하러 나가실때도, 주말에 시어머니와 동네 산책이나 쇼핑을 나가실때도, 늘 나의 그 선글라스를 애용 하신다.
15. 시아버지께선 선글라스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 그중의 제일은 나의 그 선글라스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