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와 3개 국어

도치맘 도치아들

by 장군

2017년 5월에 태어난 아들은 지금 28-29개월정도 되었다.


아무리 내가 애기한테 한국말로만 얘기 한다고 하지만 ("아 예쁘다" "괜찮아" "사랑해" 예쁜말만 가르쳐주려고 하는데 은근 쉽지만은 않은 것 ...) 내가 일 간사이에 애기 돌봐주시는 시어머니께선 스페인어가 모국어 이시고, 그래서 애기는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스페인어를 가장 자주 접하며 자라고 있다.

애기가 스스로 말한 첫 단어는 스페인어로 우유, "leche (레체)"였고, "thank you"나 "감사합니다" 전에 "gracias"를 먼저 배웠다.


영어는 어차피 유치원이나 학교 다니기 시작하면 저절로 배우겠거니 싶어서 딱히 안가르치고 있었는데, 유투브 비디오를 자기가 이것저것 눌러서 보고나더니 어느날 부턴가 "굿모닝 엄마" "땡큐 아빠" 아주 콩글리쉬 제대로다.

그래도 그나마 덜 헷갈리게 하려고 색깔은 영어로만 가르쳐줬고, 스페인어로 노란색인 "amarillo (아마리요)" 보고서 "아만" 하는것만 빼면 왠만한 색은 영어로는 제법 다 아는 것 같다.


영어+스페인어+한국어 세 짬뽕의 절정은 동물 카데고리에서다. 일례로, 애기가 하루에 한번 먹는 비타민 병에 있는 세 동물(기린, 사자, 악어)들을 보고 내가 "애기야, 얘네들 누구야?" 한국말로 물어보면 애기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기린, lion, cocodrilo!"

imageService?profileId=12026540&itemId=897980-847&recipeName=680 기린 (한국어), lion (영어), cocodrilo (스페인어)

딴소리이긴 하지만 비타민도 각 나라 언어마다 발음이 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어로는 비타민, 영어로는 vitamin [바이타민], 스페인어로는 vitamina [비타미나].

애기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부터 밤에 잠잘때까지 "비타미나 ... 비타미나 ..."를 수십번씩 말하곤 한다. (비타민을 꼬박꼬박 챙겨먹겠다는 의도 보단 그냥 젤리가 좋아서 그런거지?)




몇년 전에 한국에 동생이 다녀오면서 애기 한글 공부 할때 도움 되라고 여러 동물들이 있는 애기들 공부용 (?) 포스터를 갖다줬었다.


만 24개월 되었을때 즈음, 어느날 저녁에 시어머니가 내게 뭘 보여주시겠다면서 애기한테 스페인어로 동물 이름들을 물어보셨다. 그랬더니 애기가 이 포스터 앞에서 동물들을 막 짚었다. 애기 태어나고 처음 보는 광경이라 너무 신기했었다.

한국어로도 내가 알려준 동물들이 몇 있어서 혹시 알려나 하고 그 다음날 애기한테 한국어로 동물 이름들 물어봤더니, 또 곧잘 짚었다.


몇일 전, 애기랑 그 포스터 앞에 앉아 있는데, 동생이 화상통화를 걸어왔다.

자기가 사준 포스터가 화면에 잡힌걸 본 동생이 애기한테 물어봤다.

"애기야, 이모는 어떤 동물이야?" 그랬더니 애기는 펭귄을 가리켰다. (밤에 애기가 꼭 덮고 자는 이불에 펭귄이 그려져 있는데, 미키마우스 그려진 이불보다도 더 좋아하는게 이 펭귄 이불이다.)

"애기야, 그럼 이모부는?" 그랬더니 애기는 원숭이를 가리켰다.

"그럼 엄마는?" 그랬더니 기린을 짚었다.

"아빠는?" 그랬더니 고래를 짚었다. (고래인데 애기는 "dolphin"이라고 그랬다.)


그러다가 갑자기 애기가 내 품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바닥에 앉아 동생이랑 화상통화 하는중이었는데, 갑자기 애기가 훅 들어와서 (?) 놀랬다.

"뭐야 애기야 왜그래?" 물어보니 애기가 아빠다리 하고서 앉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계속 파묻은 채로 포스터를 가리켰다.

애기의 손 끝을 따라가 쳐다 본 포스터엔 이 그림이 있었다.

Screenshot_20170402-162215.jpg?type=w800 엄마랑 애기 고슴도치 ㅠㅠ

우리가 고슴도치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애기 낳고 기르는 친구에게서 배운 표현 중 하나가 "도치맘" 이었는데, 애기가 스스로 우리보고 고슴도치라고 하니 그게 정말 귀여워 어쩔줄 몰랐다. ㅠㅠㅋㅋ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에서 나온 말로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 없이 자기 아이가 예뻐보이는 엄마들. 도치맘.)




지금의 남편이 남자친구였던 시절.

차 사고가 나서 내 차를 폐차 시키고나서 내가 당장 차가 없어서 도움이 필요했던 때가 한달정도 있었다.

고맙게도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 남편이 학교 가는 길 오는 길 운전을 해줬었다.

같이 유기 화학 아침 수업도 듣곤 했던 때라, 중간고사가 있는 날이면 밤 늦게까지 같이 공부하다가 우리집에 와서 남자친구가 한밤 자고, 그 다음날 학교로 같이 가기도 했었다. (그때 당시 남자친구는 거실에 있는 작은 소파 위에서 혼자 잤었는데, 엄마는 요즘들어 그때 생각이 나서 지금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하신다.)


"선미야!!! 일어나 학교갈 준비 해야지 가야지 오늘 시험 있대매! 선미야!"

엄마가 아침에 날 깨우시는 소리에 잠귀 밝은 남자친구가 먼저 일어나곤 했었다.

근데 그렇게 엄마의 목소리로 들은 내 한국 이름(!)이 재밌었나보다.

같이 학교 다니던 때부터 7년 정도가 훌쩍 지나 어느새 우리 둘이 부부가 되어버린 지금에도, 남편은 내 영어이름 "Sun" 놔두고 가끔가다 "sunmiy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데. 요즘 애기가 그걸 따라한다.

ㅋㅋㅋ


아침에 일어나서 "굿모닝 엄마, 굿모닝 선미야"

내가 집에 오면 "안녕 엄마, 안녕 선미야"

내가 과자라도 하나 주면 "땡큐 엄마, 땡큐 선미야"

아주 "엄마" 소리랑 "선미야" 소리가 한 세트다.




요즘들어 아기는 넷플릭스에서 브루미즈 (Vroomiz) 랑 다이노트럭스 (Dinotrux) 만화영화 보는걸 참 좋아하는데, 특히 브루미즈를 한국어로 틀어주면 들리는 대사들을 곧잘 따라하려고 하는 노력이 참 귀엽다.


일 끝나고 와서 너무 티비 / 폰만 보게 하는거 아닌가 싶어서 언젠가 한번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브루미즈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그려줘 봤다.

가만히 앉아서 내가 그리는걸 보고있다가, 캐릭터 하나 하나가 완성 되면 좋아서 날 보고 꺅 소리 지르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가 그림 잘 그리는것도 아닌데 좋아해줘서 넘 고마워 ... 그러고보니 나 어렸을때도 엄마가 인형이나 귀여운 여자애들 그림을 그려주셨었는데. 그때 엄마 그림 보고 좋아하던 날 보며 엄마 마음이 이랬겠구나.)


KakaoTalk_Photo_2019-09-27-21-05-10.jpeg
KakaoTalk_Photo_2019-09-27-21-05-03.jpe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가지 쓰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