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아침 11시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버스를 탔다. 평일 오전의 버스 승객은 학생과 직장인이 대부분이다. 사람이 많았지만 다행히 바로 오는 버스를 탈 수 있었고 내가 타는 정거장 이후로 한 번만 정차하니 편하게 잠을 청했다.
종로 쪽 정류소에 도착하면 내리는 사람만 있고 타는 사람은 없다. 내리는 사람들의 어수선한 소리에 잠이 깼다. 차가 출발하려나 싶을 때, 젊은 엄마가 아이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아이는 대략 2살 정도 됐을까, 엄마는 아이와 함께 내가 앉은자리의 통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 시간에 버스에서 아이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내가 쳐다보니 아이도 동그랗고 까만 눈을 반짝이며 눈을 맞췄다. 낯을 가리지 않는지 함박웃음을 보이더니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아이의 손은 작고 통통했다. 마치 막 내린 하얀 눈처럼 뽀얗고 보드라워 보였다. 그 손을 꼭 잡고 내 얼굴에 살포시 대보고 싶었다.
아이의 손은 마치 단풍손 같았다. 단풍손은 손가락이 짧고 통통한 손을 말한다. 마치 단풍잎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는데 난 아이 손을 볼 때마다 단풍손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이름이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인터넷에 '단풍손'을 검색하면 몇몇 남자연예인의 손사진이 나온다. 특정연예인의 손사진인데 모두 짧고 통통하다. 많은 사람들이 잘생기고 덩치가 큰 사람이 손이 작고 통통할 때 '단풍손'이라는 단어를 쓴다. 준수한 외모와는 다르게 작은 손에 놀랍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다행이련만, 연예인의 외모를 비하하거나 비만이나 장애인의 외모를 특정해 표현하기도 한다.
국내 인기 걸그룹의 인터뷰 기사가 인터넷 뉴스에 실렸다. 멤버들 중 두 명이 서로의 손 크기에 대해 얘기하며 상대방을 '단풍손'과 '족발'이라고 서로 놀린다는 얘기를 했다. 난 이 기사를 보며 씁쓸했다. 과연 이들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의미도 모른 채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어릴 적, 친정아빠의 손은 항상 거칠었다. 한평생 노동을 업으로 여겼으니 손은 거칠고 손마디는 굵었다. 모르는 이에게 그 손은 한 노동자의 지저분한 손으로 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손등으로 툭툭 튀어나온 힘줄과 울퉁불퉁한 손마디는 아빠의 삶이 담겨 있다.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 삶의 무게를 지탱한 삶의 증거다. 그 어떤 손보다도 가치 있고 아름다운 손이다.
지금 내 손은 아프다. 울퉁불퉁하고 펴지지 않는 손, 겨울이 되면 더 아픈 손이 보인다. 류머티즘 관절염 증상이 처음 나타난 곳이 손이다. 오른손 중지부터 변형이 오더니 서서히 다른 손가락도 변했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진단받고 26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변형이 오는 것도 당연한 순서일 테다.
예전에는 손이 예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친구들은 손가락과 손톱이 길고 피부색도 하얗던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매니큐어도 한 번 바르지 않았던 그때는 손에 자부심이랄까?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다는 걸 과시했었던 같다.
한동안, 처음 보는 사람들이 손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둘러댔다. 묻는 이의 말과 시선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불편한 감정을 만들었다. 부끄러웠을까, 창피했을까. 아픈 내가 싫었고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지금 내 손은 예쁘다. 나의 병과 열심히 싸워온 소중한 내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와 외모가 다르다고, 나와 다른 환경에 있다고, 낯선 말과 시선을 갖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단풍손, 거친 아빠의 손, 아기의 손, 우리 강아지의 손 그리고 나의 손... 이 세상의 모든 손은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