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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이트 Jan 18. 2024

상처는 상처로 치유된다는 위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낯선 환경이나 사람 사이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한다. 환경과 사람이 자신에게 긍정적 가치를 준다면 익숙해지는 것은 좀 더 쉽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가치나 영향을 준다면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포기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뱉을 수도 없다.

나에게 병원은 평생을 함께 할 곳이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장소이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2달 혹은 3달에 한 번 병원에 간다. 익숙할 법도 한 이곳은 언제나 낯설고 무섭다. 병원을 다닌 26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항상 심장은 방망이 질이다. 검사라도 있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기도를 한다. 무교인 내가 아침마다 두 손을 꼭 잡고 간절히 소원한다.

운도 없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작년 12월, 류머티즘과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려 병원을 가야 했다. 하필 연말 진료라니, 그것도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 많은 사람이 한 해의 아쉬움을 달래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한데, 난 병원의 대기 시간과 검사 결과를 걱정하고 있었다.


4년 전, 심한 복통으로 동네 내과를 갔다. 초음파를 본 의사는 난소에서 혹이 있다며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라고 했다. 별일 아닐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암수치가 경계성으로 나왔다. 의사는 혹 모양과 혈액검사 결과로 정확한 진단이 어렵다고 했다. 수술 당일 응급검사로만 알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처음엔 괜찮을 거라고 위로했지만 점차 원망 섞인 생각이 들었다. 난치병으로 인생의 반을 산 내가 또 다른 병을, 그것도 암일지도 모른다니. 도대체 신은 있기라도 한 걸까, 왜 난 이렇게 운이 없는 걸까, 어떤 이유를 대봐도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마음에 켜켜이 쌓였다.  별일 아닐 거라고 애써 생각해도 부정적 생각은 꼬리처럼 달라붙어 마음을 흔들었다.


수술하기까지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부정적 생각과 긍정적 생각의 혼돈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실을 애써 부정하는 것뿐이었다. 마치 시간은 장마철 습기를 잔뜩 머금은 빨래처럼 축축하고 느리게 흘러갔다. 출혈이나 약물 과민 반응 같은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류머티즘 관절염 진료를 받는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어떤 추측도 위로도 아닌 의학적  판단의 말을 했지만, 내 귀에 박히는 말들은 부정의 날 선 말처럼 느껴졌다.




15년 이상을 같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병원은 너무나 낯설었다. 진료실도, 입원실도, 마치 처음 간 병원 같았다. 매일 느끼는 관절염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두려웠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현실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움과 공포는 수술실로 향하는 침대 위에 있는 나를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었다.


두려움과 공포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다행히 혹은 양성으로 판명됐고, 나와 가족은 안심의 눈물을 쏟았다.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던 세상이 그래도 살아갈 이유를 알려준 거라 생각했다. 일상의 존엄함을 이어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나 익숙할 법도 한 병원은 점점 낯설고 힘들어졌다. 병원에 들어가서 나오는 순간까지 모든 시간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주는 낯섦의 느낌은 더욱 깊어졌다. 내가 낯섦과 싸우는 시간, 다른 환자들은 통증과 싸우는 것 같고 보호자들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힘든 것 같다. 병원 안에서 들여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신음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다. 언제쯤 이 낯섦을 익숙함으로 느낄 수 있을까. 영영 오지 않는 건 않을까. 걱정과 두려움에 이전과 다른 낯섦이라는 감정이 쌓였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 밖에 위로할 수 없다.”
양귀자 <모순>



가끔은 나도 아픈 사람을 보며 안도를 느낀다. 검은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면 사정없이 동요된다. 휠체어를 탄 사람을 보거나 부축받는 사람을 보며 난 아직 괜찮다고, 걸을 수 있으니 됐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고 나면 병원이 주는 두려움과 낯섦을 이겨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위안을 삼는다는 것이 잘 못 된 것임을 안다.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의 고통의 깊이를 안다.

타인의 고통에서 위안을 찾는 것이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누군가 나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상처로 위로받은 내가 상처 입은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어쩌면 이것이 아픔을 가진 사람만이 아는 공감과 치유의 방법이라는 생각도 한다.


잠시 누군가에게 기대어 숨을 고른다. 지금보다 더 아프지 않길, 지금보다 병원에 가는 횟수가 늘지 않길 바란다. 언젠가는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뀔 거라는 기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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