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이다. 코로나가 막 시작될 무렵, 대만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온 후 4년 만의 해외여행이다. 면역질환자에게 감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가히 공포에 가깝다. 3차례의 코로나 예방접종으로 심한 부작용을 겪었다. 난생처음 119 응급차를 탔고, 코로나 감염으로 한 달 동안 심한 통증으로 힘들었다. 일상이 회복되었지만 해외여행은 버킷리스트가 되었고, 떠나는 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점차 주변에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감염 위험이 줄고 개인위생에 유의하면 되니 나의 여행세포도 슬금슬금 살아났다. 꿈틀거리던 여행세포는 먹구름을 걷어낸 햇살처럼 두려움과 걱정을 싹 날려버렸다.
“그래, 가는 거야!”
가족과 함께 가까운 도쿄여행을 계획했다. 오랜만의 해외여행은 마치 첫 여행 같은 설렘과 두근거림을 갖게 했다.
여행계획을 세우는 일련의 시간은 즐거웠다. 마음만은 20대 못지않은 난 자유여행을 선호한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 수 있는 자유여행은 더욱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 우연히 걷게 된 길, 생소한 현지 음식, 그리고 그들의 일상을 보는 것은 여행의 묘미다. 더구나 요즘은 번역앱, 구글지도만 있어도 어디든 갈 수 있으니 언어나 생소한 곳에 대한 걱정도 없다. 손에 비해 다리 관절도 괜찮으니 걷는 것도 괜찮다.
같이 가기로 한 딸이 다른 일정으로 못하게 되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았다. 동선을 짜고 도쿄의 유명하다는 식당도 찾았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한 카페와 박물관, 미술관 관람도 계획에 넣었다. 열정도 이런 열정이 없다. 젊은 시절과 아이가 어렸을 때는 관광지와 아이 위주의 장소를 갔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 남편과 함께 하는 여행은 온전히 두 사람의 맞춤여행이 되었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은 짧은 것 같았다. 출발도 안 했는데 길게 잡지 않은 여행기간이 못내 아쉬웠다.
출발 전 날, 여행짐을 싸기 위해 집에 있는 가장 큰 여행가방을 꺼냈다. 이전의 여행짐을 생각하면 21인치 여행가방은 작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로 약을 담고, 나와 남편의 옷과 세면도구를 넣었다. 여행가방 3분의 1만 채워졌다. 뭘 빠트렸나 싶어 다시 짐을 뺐다.
"약, 내 옷, 남편 옷, 세면도구……다 넣었네. 근데 왜 이렇게 짐이 없지?"
오랜만의 여행이라 잊은 게 있나 싶어 또다시 점검했다. 없다. 더 이상 넣을 짐이 없다.
난 일상에서 그렇게 세심하거나 꼼꼼한 성격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약속이나 짐은 챙길 때 등 몇 가지에선 예민한 편이다. 특히 여행 갈 때는 만약을 대비해 뭐든 넉넉하게 가져간다. 특히 약은 두 배로 가져간다.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으로 현지에서 발이 묶일 경우를 대비해서다. 하루라도 약을 먹지 못한다면 통증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약을 넉넉히 챙기고 나니 다른 짐은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가, 아니면 4년 사이가 성격이 변한 건가 나 자신이 의아했다. 없어서는 안 될 약이 있으니 다른 것은 부족하면 사면되고, 없어도 그만이다. 여행의 대한 설렘, 그것만으로 행복했고, 짐 없는 가방은 들뜬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도쿄에 도착하고 남편과 호텔을 찾아갔다. 남편의 손에는 3분에 1만 찬 트렁크와 어깨에 맨 작은 배낭, 나에겐 작은 크로스백이 전부였다. 짐이 많지 않아서 호텔까지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가방을 여는 순간, 빈 공간이 많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짐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자기야, 우리 여행짐 가져온 거 맞아? 정리할 것도 없네”
도쿄여행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옷은 거의 매일 같았고, 화장품을 챙겨 오지 않아 거의 맨얼굴로 다녀야 했다. 기미가 얼굴을 덮었고 머릿결은 푸석해졌다. 희끗희끗 올라온 흰 머리카락과 얼룩덜룩 보이는 얼굴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멋스러운 카페와 향긋한 커피 향에 취했고, 도쿄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화가의 작품을 보며 감동했다. 도쿄 작은 마을의 골목을 걸으며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어쩌면 여행가방의 무게는 여행의 부담감과 비례하는 건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젊음을 뽐내고 가꾸기 위해,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이를 위해 짐을 챙겼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나만을 위한 여행짐을 챙긴다. 옷도 화장품도 액세서리도 없는, 반도 채워지지 않는 여행가방. 그러나 여행가방의 빈 공간은 결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웠다. 가벼워진 가방과 마음은 시간에 집중하고 나에게 집중하게 했다.
여행은 내 나이와 신분과 체면을 모두 다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
[여행의 쓸모]-정여울
정여울 작가는 [여행의 쓸모]에서 “여행은 내 나이와 신분과 체면을 모두 다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라고 했다. 나만을 위하고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그것이 여행의 진정한 매력일 것이다. 결국, 여행은 진정한 자아를 만나고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가면 매일 느끼는 통증은 사라지고 손가락도 붓지 않는다. 여행은 통증이 사라진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지금, 나는 또 다른 여행을 생각한다.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여행짐과 함께 하는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