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왔숑~ 남편 문자다.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이 되자 문자가 왔다.
“자기야, 집에 무 있어? 양파는? 청양고추도 없지?”
남편은 회사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집에 있는 식재료를 묻는다. 난 오늘도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오늘은 뭘 만들 건데? 집에 다 있어, 다음에 주문해”
올 초, 남편은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시작했다. 남자들이 중년이 되면 요리를 시작한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 들었고, 여러 방송을 통해서도 익히 들었던 터라 내 남편도 중년이 됐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남편의 첫 음식은 김치였다. 남편은 내가 집을 비우면 딸과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기는 했으나 요리라고 할 만한 것들은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만든 음식이 김치라니! 살림 연차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 할 수 있는 것이 김치 담그기 아닌가. 나도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선택한 지 20년 차이지만 김치를 담근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첫 음식이 김치인 것도 놀라운데 맛까지 있어 어리둥절했다. 숨겨놓은 재주가 아닌 건 확실하니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남편과 나는 한바탕 웃었다.
난 요리가 적성에 맞지 않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오래 앓다 보니 손도 아프고 체력도 되지 않아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것만 만든다. 딸이 어렸을 때는 젊고 손 상태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매 끼니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다. 주부라는 직업적 열정과 어린 딸의 영양과 건강을 위해 유기농과 제철 재료를 사용했다. 거기에 사랑이라는 양념이 첨가되어 식탁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세월에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점점 나이가 들고 손 상태도 나빠지니 요리와는 멀어지게 됐다. 내가 요리와 서서히 멀어지는 시점에 남편은 요리와 사랑에 빠졌다. 평일이야 출근해야 하니 내가 주방을 담당했고 주말이 되면 메인 셰프는 남편이 되었다. 남편은 재료, 용량, 시간을 정확히 맞춰 조리한다. 거기에 재료는 유기농이요, 천연 조미료만 사용한다. 단점을 꼽으라면 조리 시간이 무척 오랜 걸린다는 것과 주방이 난장판이 된다는 것, 그리고 식기 세척기가 하루 종일 돌아간다는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든 딸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이든 나와 딸은 먹기만 하면 되니 남편의 요리 취미는 좋았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는 법. 어느 순간 남편의 과도한 요리 열정이 집착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요리를 시작하면서 장을 보는 횟수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평일은 유기농 업체의 새벽 배송을 이용하고 주말에는 대형 농산물 마트에 간다. 무료배송과 이벤트 문자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만들고 싶은 음식이 생기면 주저 없이 재료를 주문한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는 재료를 확인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이뿐만 아니다. 소스나 양념 종류는 대용량으로 주문하고 당장 쓰지도 않는 재료를 미리 사놓는다. 이 상황이 자주 반복되니 냉장고, 김치냉장고, 주방 수납장이 식재료로 넘쳤다. 살림 솜씨가 없는 나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조언하고 싶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까, 요리를 안 한다고 하면 어쩌나, 그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잔소리를 꼴깍꼴깍 삼키기만 했다.
남편은 과거에도 무언가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했다. 딸이 유치원에 다닐 즈음, 남편은 장난감 조립에 빠졌다. 딸과 함께 조립하는 재미에 고가의 제품도 샀다. 해외 출장을 가면 현지에서 저렴하게 사서 큰 트렁크 하나를 제품으로 가득 채워 오기도 했다. 거실 대형 수납장은 장난감으로 가득했고, 딸이 초등학생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다음은 책이다. 결혼 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결혼하고 취미가 책 수집인가 싶을 정도로 사기 시작했다. 당시에 일산 쪽에 거주하고 있어서 파주출판단지와 가까웠다. 책 관련 행사는 빠지지 않았고 딸의 교육에도 좋으니 자주 방문했다. 중고책 판매 사이트가 생기면서 더 자주 책을 샀다. 그야말로 남편은 책 쇼핑을 했다. 한 번은 이사를 위해 책을 팔아야 했다. 중고책 판매점에 판 책값이 무려 사백만 원 가까이 나왔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많은 책을 팔았는데도 이사한 집 방 하나가 책으로 가득 찼고 이삿짐센터 사장님은 가장 힘든 이삿짐이 책이라며 투덜거렸다. 책 쇼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행히도 나와 남편의 공동취미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취미만은 끝나지 않길 바란다.
요리는 이전 취미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장난감과 책은 유통기한이 없다. 그러나 식재료는 유통기한이 있고, 썩어버린다. 그냥 버려야 한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요리하는 행위는 열정이지만 재료 구입은 집착으로 보였다. 나의 ‘생각 꼬리물기’가 시작됐다. 예전에 읽었던 저장 강박에 관한 기사가 떠올랐다. 저장 강박은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사용 여부에 상관없이 무조건 저장한다. 미국의 한 연구기관에서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물건에 과도한 애착을 보이고, 외로운 마음을 채우기 위한 자기 보호기제로 발동한다는 것이다. 혹시 요즘 외로운 건가? 아니면 회사에서 무슨 문제가 있나? 아니면 다른 심리적 문제가 있나? 난 이런저런 예측을 하고 남편의 행동에는 분명히 부정적 원인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남편에게 요리하는 이유와 자꾸 식재료를 사는 진짜 이유가 뭔지 물었다.
“요즘 시간도 많고, 당신은 손이 아프니 내가 해야지. 그리고 처음이니까 잘 몰라서 그래. 익숙해지면 주문도 잘하지 않을까?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근데, 오늘은 뭐 먹고 싶어?”
남편의 대답에 민망하고 미안했다. 나도 신혼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친정엄마에게 전화해서 조리법을 물었고, 냉장고에는 식재료가 썩기도 했다. 만든 음식이 맛없어 버리기도 수 없이 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는다고, 나의 요리 초보 시절을 잊고 있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남편의 요리 솜씨는 셰프급인데 말이다.
누구에게나 실패와 실수가 반복되는 초보 시절이 있다. 남편도 지금은 요리 초보다. 어쩌면 난 내가 해왔던 일을 남편에게 넘기는 걸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귀인이론처럼 남편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단정했다. 남편의 요리는 열정도 집착도 아닌 사랑인데 말이다. 그것이 아니래도 상관없다. 자신이 요리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면 됐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난 그저 맛있게 먹어주면 될 것을. 당신의 취미,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