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아, 졸업 축하해~ 멋지다 멋져!!”
“어떻게 그 힘든 시간을 보냈니... 기특하다!”
홀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조카(여동생의 딸)가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왔다. 오랜만에 가족 모임에 온 조카는 몸도 마음도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남자친구도 사귄다면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얘기했다. 조카 남자친구 신상이 화젯거리가 되었고, 친정 식구 모두 질문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직업은 뭐야? 키는? 형제는? 부모님은 계시고?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그런데 나이가 31살. 조카보다 7살이 많았다. “결혼을 빨리하자고 하는 거 아니니?” “대화는 통하니?” 곧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질문을 했다. 그러나 조카는 덤덤한 표정으로 툭하고 한마디 던졌다. “우리 둘 다 비혼주의자예요. 결혼할 생각 없어서 만나는 건데. 나이니, 뭐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해요.”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던 소나기가 멈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예상 밖 대답에 모두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조카는 놀라는 우리가 더 이상한 듯 쳐다봤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세상이 이상해졌다며 조카의 앞날을 걱정하셨다.
조카의 당당한 ‘비혼주의선언’을 들으니 변화된 시대만큼 결혼의 의미와 형태도 많이 변한 것 같다.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지 사회적 강요로 이뤄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삶의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사랑도, 결혼도 통념적 개념에서 많이 벗어났다. 그러나 내가 결혼했던 20년 전만 해도 ‘연애는 곧 결혼’이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나도 직업, 나이, 가치관 등 배우자에 대한 이상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부합되어야만 소개받았다. 연애를 시작하면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통 여성이 30살이 넘으면 노처녀라는 타이틀(?)을 줬는데,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결혼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회사에 30대 중반의 언니들이 몇 명 있었다. 가끔 회사 사람들은 “혹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저러다가 이혼남 만나겠는데”라며 수군거렸다. 나도 험담을 듣게 될까 걱정했다. 다행히도 28살에 남편을 소개받았다. 당시에 나는 힘든 직장 생활에 지쳐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한 달 후 퇴사하고 장기 여행도 할 예정이었다.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상대는 30대 중반의 고학생. 박사과정 4년 차. 예전 같으면 “됐다, 안 만날래!”라고 딱 잘랐을 조건. 그런데 곧 백수가 되는 내가 뭘 따지겠는가. “하루 만나서 맛있는 거나 먹고 헤어지지 뭐.”라고 생각했다. 처음 본 남편의 모습은 예상을 벗어났다. 고학생 이미지는 없고 스마트한 외모에, 입담까지 있었다. 들어본 적 없는 연예계 얘기며 팝송, 만화책 얘기까지. 오호 뭐지? 스테레오타입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을 만나다니. 놀랍고 유쾌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한 달 후 떠난다는 처지는 잊고 하루가 멀다고 만났고,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내고 1년 후 결혼했다. 불확실한 미래와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의 벽이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결혼을 결정했다. 20년 동안 큰 탈 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친구는 나의 결혼 스토리를 듣고는 “결혼은 로또야, 결혼도 로또처럼 결과를 보기 전까지 몰라. 넌 로또에 당첨된 거잖아.”라고 했다. 친구는 선을 보고 3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부모님이 조건을 보고 선택한 남자라 믿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연애 기간이 짧았지만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고 살면서 맞춰가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신혼 초부터 가치관의 차이와 성격적 문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같이 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문제들은 집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긴 시간을 다툼과 분노로 서로에게 상처를 줬다. 지금은 이전보다 편안해졌지만 남편과 다툰 날은 로또를 잘 못 샀다며 자조 섞인 말을 한다.
사람들은 당첨될 거라는 희망으로 로또를 산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행복이라는 희망을 품고 결혼하지만 살아보지 않고 알 수 없다. 그래서 신중한 선택의 과정이 필요하다. 남편과 결혼을 결정할 때 확신이 있었다. 대화를 통해 성격과 가치관을 알게 되고, 생활방식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보면서 미래를 계획했다. 만약 이런 시간 없이 감정만을 가지고 결혼을 결정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로또를 구매할 때도 이번 회차에 살지, 말지, 또는 자동으로 할지, 수동으로 할지 고민하고 선택한다.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결혼은 로또와 비교할 수도 없는 선택이다. 두 사람의 결합은 가족과 지인 등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확장의 열쇠도 된다. 그만큼 책임도 따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조카처럼 젊은 세대에게 결혼은 비혼주의자, 동성애 결혼, 사실혼 관계 등 다양한 관계 형태의 하나가 되었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가 되었으니 조카의 비혼주의자 선언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결혼은 로또와 비슷하다. 그러나 꼭 로또를 사야만, 결혼해야만 행복한 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 로또가 되면 된다. 다음에 조카를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야겠다.
“00아, 너의 비혼주의를 지지한다, 너의 선택이 바로 로또야!”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