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부모님을 비롯해 여동생과 남동생은 시력이 좋았고 가족 중 유일하게 나만 안경을 썼다. 아마도 텔레비전을 가까이 보던 잘못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부모님은 그렇게 TV를 보면 눈이 바빠진다며 매번 잔소리하셨지만 황소고집도 저리 간다는 고집을 가진 나는 결국, 가족 중 유일하게 안경을 쓰게 됐다. 당시에는 나만 안경을 쓴다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때로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으쓱한 기분도 들었다. 부모님이야 점점 시력이 나빠지는 딸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을 것이고,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살림에 안경을 사줘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고 철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고집으로 뭔가를 했다면 지금쯤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웃픈 생각과 참으로 부모님 말씀 안 듣던 딸이었구나 싶다. 이후로 시력은 점점 나빠졌고 안경은 나와한 몸이 되었으니 그 결과야 뻔한 것이었다.
안경을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20대 중반이었다. 대학교 후배는 쌍꺼풀 수술하러 성형외과에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언니의 눈은 생각보다 크고 이쁘다, 안경을 벗으면 다른 이미지를 가질 것이다 등 완전히 다른 나의 이미지를 얘기하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당시에 성형의 메카였던 이대 앞의 성형외과를 방문하게 되었다. 후배는 눈이 매우 작은 실눈이었는데 의사는 쌍꺼풀 수술에 적합하지 않다, 하더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할 거라면서 부정적 의견만 잔뜩 얘기했다. 그때 실망하던 후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드디어 나의 상담 시간. 무슨 일인지 의사는 후배를 상담할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쌍꺼풀 수술에 최적화된 눈이고 수술 후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아, 왜 이제야 오게 됐는지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상담하는 내내 당장이라도 해야겠다는 의지가 솟아났고, 완전 다른 나를 상상하며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마치 의사는 신이고 나는 신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는 눈의 지방층이 두껍다며 두 번 이상의 수술과 2배의 비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뭐지, 이 의사? 갑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기대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의사는 사자이고 나는 사자에게 잡힌 먹잇감이 된 듯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 나는 상담을 서둘러 끝내고 후배와 황급히 병원을 탈출했다. 더 이상 그 의사는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신이 아닌 나를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포악한 사자로 느꼈던 것 같다.
결혼식도 안경을 벗어보자 결심했던 날이었는데, 내 인생에서 안경 벗기 시도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결혼식 날은 신부 화장을 하기 위해 분신(?)과도 같은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껴야 했다. 콘택트렌즈를 처음 껴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착용할 때마다 느낀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세균이 있으면 안 되니 어느 때보다 청결하게 손을 닦아야 하고, 렌즈가 조금이라도 구겨지면 안 되니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며, 혹시라도 렌즈가 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세척해야 하는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는 짜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소개팅이나 업무상 특별한 날이 아니면 콘택트렌즈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식을 다르지 않은가. 중요한 날이니 당연히 안경을 벗고 신부 화장을 하기 위해 렌즈를 착용했다. 평소에도 화장하지 않았기에 두꺼운 눈화장도 불편한데 콘택트렌즈까지 착용했으니, 마치 꽉 끼는 옷을 입어 숨쉬기 힘든 것처럼 답답했다. 결혼식의 긴장감에 더해진 불편함은 결혼식 내내 계속되었고, 신혼여행지에 도착해서 렌즈를 빼고 안경을 썼을 때의 편안함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라면 안경 쓴 신부로 당당하게 섰을 텐데…. 무척이나 아쉬운 생각이 든다. 결국 결혼식 이후로 더 이상 안경 벗기 시도는 하지 않았다.
안경은 신체의 결점을 보완해 주는 도구이자 현재의 내 이미지를 만들어준 존재다. 이 이미지는 특별히 트렌드에 민감하거나 센스가 뛰어나서 생긴 것이 아니다. 안경을 벗었을 때의 불편함을 참기 힘든 기질과 안경을 쓰면 화장 안 해도 되는 조금 게으른 성격이 안경을 선택할 때 신중하게 만들었다. 신중함에 예민함까지 더해지면서 한 브랜드, 한 형태의 안경만 착용하게 되었다. 옷을 선택할 때도 안경과의 매칭에 신경을 쓰다 보니 색깔과 스타일이 비슷해졌고 나만의 이미지가 탄생한 것이다. 가끔은 안경을 벗고 화려한 메이크업과 옷을 입고 싶기도 하다. 또, 만약 쌍꺼풀 수술을 했다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는, 살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경을 벗는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또다시 슬금슬금 어색함과 불편함이 떠오른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조금은 요상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가족, 친구, 지인들은 ‘〇〇(이름) 스타일이다’라는 말을 한다. 비록 명품도, 고급스럽지도, 독특하지도 않지만, 딱 나 같은 스타일 말이다. 그러니 안경은 나에게 그냥 ‘안경’이 아닌 ‘ 〇〇(이름) 안경’, 바로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