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슬머리의 여름

여름을 좋아하냐 물으신다면

by 이가든

난 여름이라면 질색이다. 나서부터 허약체질에 더위는 별로 안 탔지만, 에어컨 바람에 감기를 달고 살고, 무엇보다도 내 머리카락, 악성 곱슬머리 때문이다. 내생에 이 계절을 좋아할 수 있겠냐고? 아니, ‘단연코 그럴 수 없다!’였다.

곱슬머리는 비 오고 습한 날이면 앞머리 옆머리 머리 온 천지가 구불구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나이가 들수록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앞머리만 반곱슬이던 게 전체 곱슬로 변하면서 요즘 같은 덥고 습한 날씨면 머리카락이 조금 과장해서 2배는 커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꼬불거리며 너른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는 보면 차라리 시골 할머니 뽀글 머리 파마를 해버릴까 싶기도 한데 차마 하지는 못하고.

이 다루기 어려운 머리덕에, 어린 시절 로망인 긴 생머리 여인의 모습을 포기해야 했고, 아니 그렇게라도 보이기 위해 20대에는 네댓 달에 한 번씩은 미용실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고도 2-3일은 기름진 머리와 씻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은둔은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런 곱슬머리 덕에 나는 여름을 단연코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싫어했다.

곱슬머리로 십 대부터 멋 부리느라 고생 좀 해본 여자라면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늦어도 6월 중순까지는 매년 매직을 해야 했고, 시술의 약발이 떨어져 가는 9월즘이 되면 머리카락은 한없이 거칠면서도 반쯤 뜬 채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새 학기 패션과 멋 부림은 죄다 머리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학부 시절에는 학교 앞 미용실에서 일 년에 두 번은 매직을 해버렸으니 머리카락에 대한 학대 수준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자면 흰머리 염색까지 해야 하니 머리에 드는 비용은 적게 잡아도 5-60만 원은 넘게 될 것이다. 그마저도 일을 쉬고부터는 꾸밈비를 절약해야겠다 싶기도 하고,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있어서 미용실 의자에 세 시간이 걸리는 시술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일 년에 한두 번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올해도, 적어도 5월 중순까지는 곱슬머리로 여름 나기를 그렇게 고민하며 머리카락을 펴야 하는 일정을 꼽아보고 있었다.

싹둑, 댕강...

어느 날 아침, 충동적인 성격에 앞뒤 고민도 없이 그저 뭐에 씐 건지 앞머리를 집에서 자르고 말았다. 그것도 미용가위도 아닌 문구가위로.

싹둑. 스스슥...

곱슬이라 머리카락을 눈썹 아래로 잘라도 손을 떼고 나면 댕강 이마 한가운데가지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무슨 심보인지 조금 더 짧게 잘라보자 싶어서 눈썹 위에서 과감히 잘랐더니만 머리카락이 이마 끝까지 바짝 올라가고 말은 것이다. 곱슬머리가 앞머리를 기르는 건 시간 들여 고생하는 현명하지 못한 선택에 가깝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울 속에 나는 ‘이건 도저히 사회생활이 안될’ 모습이 되어버렸고, 차마 미용실에 이런 머리 상태로 가서 무언가 회복할만한 시술을 부탁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쩌겠는가, 나는 포기가 빠르다. 내가 굳이 벌인 일을.
그리하여 방법을 고민하다, 5월부터 급한 대로 모자를 하는 수 없이 쓰게 되었다.

그래 차라리 모자를 쓰자.

머리를 바싹 말리고 쓰면 앞머리 길 때까지 얼마간은 내 심술 맞아 보이는 앞머리를 숨길 수 있고. 그래 여름의 강한 햇볕 때문이라며 둘러대면 별 볼 일 없는 사회적 지위라도 조금은 지킬 수 있겠지. 귀여움도 심지어 애처로움도 없어 보이는 짧은 앞머리 덕에 그렇게 모자를 계속해서 쓰기 시작했다.

모자를 세 개나 갖게 되다니

처음에는 챙이 있는 얇은 모자를 썼다. 몇 년 전 여름부터 가끔 스던 건데, 적당히 목과 얼굴을 가려주면서 땀도 잘 마르고 세탁해도 금방 마르고 가벼운 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약속 시간이 남아 들렀던 백화점을 둘러보다가 핑크색 모자를 하나 구입했다. 단순히 캡 하나 써볼까. 이런 때 아니면 또 언제 써보겠어 하고 무심코 골랐다. 인터넷에서는 만원 정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데, 집에 가면 안 살게 뻔하고 하루 더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는 셈 치기로 했다. 이렇게 예쁜 핑크는 하나쯤 있어도 되고 안 쓰면 아들에게 주기로 하면서.

그러다 모자에 맛이 들려 모자를 하나 더 구입했다. 조금 바랜 버건디 색상의 데님 모자인데 얇고 가벼운 데다 빈티지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뒤통수에 길이 조절끈은 인조가죽으로 되어 있는데 색의 배합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요즘 쓰는 모자가 세 개가 되었다. 애써 신경 쓴 머리 눌릴까 봐, 그리고 돈 들여 머리 했으니 감출 필요가 없어 쓰지 않던 모자를. 보통의 사람도 이 정도는 있겠지만, 나로서는 인생 가장 많은 모자를 갖게 된 것이다.

가끔 너무 더워서 땀이난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으면 탈모가 된다는 얘기가 떠올라 걱정이 되기도 한다. 머리카락과 두피를 지킬 것인가, 사회적 이미지를 지킬 것인가를 두고 갈등이 될 때가 있는데, 지금은 어느덧 앞머리가 2 센티미터는 더 자라 있어서 조만간 탈모 걱정은 접어둬도 될 듯하다니 조금만 버티자 생각했다.

곱슬머리 걱정 없이 보내는 첫여름

그런데 이렇게 모자를 쓰다 보니, 더위와 땀에 구부러질 곱슬머리 고민이 인생에서 이만큼 옅었던 적이 있나 싶다. 그냥 모자 하나 푹 눌러쓰면 되는데, 돈 들여 매직 시술을 안 해도 되고, 흰머리 염색 걱정 안 하고 말이다. 모자 하나로 어느덧 이번 여름은 곱슬머리 걱정 없이 보내게 되는 첫여름이 된 듯하다.

이렇게 간편했다고? 물론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 그것만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럴 일이 있다면, 식었던 열정과 에너지를 모아다 고데기로 한번 쫙쫙 펴보면 되겠지 뭐. 물론 아쉽게도 그럴 일이 없지만. 나이를 먹으니 그게 참 편한 부분이다.


덥거나 습하면, 또 비가 오면 나가기 싫었던 여름의 외출이 모자 하나로 간편해졌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면 되지” 스스로 묻다가도. 오히려 모자 하나로 기분도 좋아지고 일말의 자존감도 회복되는데, 그리고 곱슬머리 하나쯤 모자로 덮으면 앞으로의 몇 달이 편해지는데 내가 왜 이걸 마다하겠는가.

우연히 앞머리 한번 잘못 잘랐다가 오히려 인생이 편해졌다.

여름의 더위와 습도, 장마도 모자 하나면 두렵지 않으니 습한 날의 산책쯤은 꼬부라지는 머리 걱정 없이 가볍게 언제든 나갈 수 있다.


모자를 쓰고 나가니 여름은 언제나 그랬을 텐데 주변 풍경이 새롭게 보인다.

여름 햇빛, 습기를 머금은 날에는 조금은 묵직해진 나뭇잎의 터질듯한 생동감. 그리고 숲길에 풀과 나무의 살 냄새가 진동을 한다.

여름은 뭉뚱그려 그냥 빨리 지나가면 좋을 계절이었는데. 그동안 풀향기에 굶주린 사람처럼 매일 산책을 나가게 된다.

여름을 좋아할 수 있겠냐고?

글쎄, 아직 좋아하기엔 이르다.


그렇지만 아마도 인생 처음으로 이 계절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들뜬다.



* 역대 최고 무더위 전에 썼던 글이에요.

요즘 예년보다 덜 습해서 좋긴 한데, 그래도 더위가 한풀 꺾이길 바랍니다.


오랜 고민은 우연히, 쉽게 풀리기도 합니다.

저는 그린이나 네이비색 모자를 하나 더 장만하려고요.

안 쓰면 더 좋겠지만 아직이에요. 예쁜 모자 몇 개 더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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