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어릴 적, 문구점에서 봉숭아 가루를 판다며 사달라고 조른 적 있어요. 짝이 그것으로 꽃물을 들였는데 예쁘더라고 덧붙이면서요. 딸도 저처럼 봉숭아 꽃물에 배신당한 적 있어 제대로 물들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거예요.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문구점에 들러 봉숭아 가루를 집어 들었죠.
본보기용 화장품 용기만 한데 들어 있는 갈색 가루는 신비로운 빛깔을 낼 기미 따윈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반죽 후 손톱에 올려놓기만 하면 꽃물이 곱게 든다는 설명서가 서둘러 물들이라 유혹했죠. 손가락을 꽁꽁 동여맬 비닐 집도 필요 없다면서요.
샐비어빛 손톱이 제 것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다시금 잔잔하게 피어오르더군요. 실망을 안긴 봉숭아 꽃물의 미련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호! 놀라워라.
의심스러웠던 갈빛 반죽은 지난날의 치욕을 고스란히 거둬갔어요. 인조 봉숭아의 인심은 가히 반향을 일으킬 만했죠. 쨍한 진홍빛은 밀착된 옷을 입은 것처럼 손톱과 한 몸이 되었어요.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말이죠.
다홍빛 손톱을 바라보며 ‘물들임’이야말로 유전의 법칙 중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딸에게도 제 어린 날의 치기가 핏줄을 타고 흘러 떠돌았던 일이 있거든요. 제가 가위를 들어 눈썹숱을 정리했던 것처럼, 딸도 자신의 눈썹을 한 올 한 올 뽑았던 사건이에요.
어느 날 로션을 발라 주다 보니 지천으로 돋았던 눈썹 숲이 군데군데 비어 흰 바닥이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어요. 연한 눈썹이 갖고 싶었다고요. 눈썹숱이 많아서 강해 보이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나 봐요. 그 옛날 저처럼요.
자라온 시간과 공간이 다른데 어미의 빛깔로 여과 없이 물든 딸을 보며 꾸중할 수 없었죠. 떠난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는데 태의 자리에서 물든 대로 따라 하는 딸을 보며 어미의 빛깔이 얼마나 진하고 오래가는 염료인지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었죠.
가공의 빛깔이 어지러이 춤추는 세상이에요, 갈색 가루가 더 진짜 같은 빛깔로 봉숭아 행세를 하는 것처럼요. 그런데도 거부감보다 오히려 만족감을 드러냈어요. 천연에서 얻지 못한 빛깔이라며 호들갑까지 떨면서요. ‘어떻게 하면 가장 순수한 빛깔로만 물들 수 있을까?’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진홍빛에만 욕심을 낸 거죠.
세상은 눈 깜짝할 새 자연에 버금가는 색다른 빛깔을 내놓고 물들지어다 주문을 외워요. 한눈팔다 보면 주문에 걸려들기 일쑤죠. 원하지 않았던 빛깔에 물들어버린 자신을 발견할 때가 그럴 때죠. 욕심에 눈이 멀어 위조된 빛깔인지 구분 못하고 미혹된 거죠.
한 번의 실수로도 물이 잘못 들면 사람이건 세상이건 다시 제 빛깔을 찾기 힘들어요. 회복한다 해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죠. 다른 이의 빛깔이 화려하다며 무조건 따라 물들다가는 혼탁한 빛깔 뒤에 숨어 울게 될지도 몰라요. 어렵더라도 각자 기준을 가지고 제 빛깔을 지켜가야 해요. 가장 아름다운 빛깔이니까요.
우리는 휴머니즘에서 비롯된 것이 아름다운 빛깔이라 알고 있어요. 그런 까닭에 마음에서, 몸에서, 심지어 그림자에서까지 깊은 향이 나려면 제 빛깔에 '인간다움'이 묻어나야 해요. 사람답게, 곱게 물든 이의 빛깔은 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구분해 가슴이 병들지 않도록 이끄니까요.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바라보는 곳엔 순수한 빛깔로 채색된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누군가가 고개 돌려 바라보는 사람이 되려면, 누군가에게 얼룩이 되지 않으려면 자기 안의 빛깔일랑 수시로 다듬어야 환한 빛이 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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