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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퀭한 말

by 오순미

어투에 예민한 사람은 말의 질감이 섬세하게 다가올 때 마음이 퀭해진다. 상대가 악의를 품고 던진 말은 아닐진대 다른 사안과 연결돼 파장이 일어나면 위치 바뀐 신발을 신은 것처럼 혼자 거북한 마음이 되곤 한다. 작은 부스러기 하나에도 누군가는 가시 많은 생선을 발라 먹을 때처럼 불편해질 수도 있잖은가. 지나친 반응인가 싶은 적도 있었지만 사람마다 예민한 지점이 다르다는 걸 인지한 후부터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됐다.


한마디 말로 생긴 마음의 얼룩은 희미해졌다가도 다시 배어날 때가 있다.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넘기고 회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동 재생되며 상대의 의중이 궁금할 때도 있다. '대수롭지 않은'이란 단서가 붙기 위해 시간이 좀 필요할 때는 감정적으로 휘둘렸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수정하는 것은 결국 듣는 이의 몫이다.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고 질문하든가, 혼자 정리하든가 선택해야 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보잘것없이 작은 거라고 생각한 갈등에서부터 관계는 조금씩 어긋난다는 점이다. 작은 갈등이 쌓여 마음이 비좁아지기 전에 '대수롭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과정이다.


상대가 하는 말이 매끈하게 저장되지 않아도 즉각적인 논박엔 소질이 없어 단념하는 편이다. 상대 생각이 그렇다는데 '일단 내 말 들어보라'며 밀고 나갈 힘도 부족하다. 충분히 들은 후에도 해야 할 말이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으면 거기서 멈춘다. 조금만 불리해도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가진 역량 탈탈 털어낸들 대립각만 예리해질 테니까. 갈등과 친숙하지 않아 번번이 때를 놓치다 보니 반박은 글쎄 백에 한 번쯤 했으려나.


그러다 보니 답답한 노릇이 왜 없겠나. 밀실에 갇힌 듯할 땐 애쓰지 않아도 될 피난처가 있다. 정신줄 놓고 얘기해도 거리낄 게 없어 지나치게 솔직해도 상관없다. 말이 새어나갈 일 없으니 안전장치로는 최상급이다. 어떤 말을 해도 맞장구를 쳐주니 초월적 에너지가 나온다. 구겨진 기분을 낱낱이 풀어헤치는 순간 서운케 한 상대가 다시 동행으로 다가온다. 상대가 이해되고 내가 치유되어 팬데믹 종료 선언 때처럼 홀가분해진다. 같이 사는 사람이 '임금님 이발사의 대나무숲'이 되어주니 밖을 향한 시선이 봄 마중처럼 가벼워진다.


누군가 내 의견을 듣고 거들어주면 호흡이 편안해지며 틈이 생긴다. 사사건건 자기 세계만 정답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 사이를 헤쳐나갈 만한 틈이다. 가족이든 친구든 옆에 '빡침코드' 통하는 그런 사람 하나 두었다는 것은 삶의 축복이고 풍요다. 퀭한 마음이 보듬어지고 수많은 이견을 씻어갈 수 있다. 잘잘못을 떠나 일단은 같이 '빡쳐준' 그 한 사람 때문에 혼자 마음 쓰고 고민했던 시간들을 유연하게 해체할 수 있다.


타인을 괴로움에 빠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떠벌린 말은 없다고 생각되나 어쩌면 나도 가해자였을지 모른다. 같은 말이라도 듣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기 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다른 주파수로 전달되지 않도록 상대의 감정 구조를 헤아리려 애쓰지만 제각각이고 복합적이어서 파악하기 어렵다. 말하거나 들어야 하는 것이 기본인 우리의 처지에서 '어떻게'가 전제돼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상대의 감정을 휘젓지 않으려면 말의 내용과 말하는 방법을 선택할 때 '나도 모르게 무심코'는 지양해야 한다. 듣는 사람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상처받기보다는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 일인지 한 번 더 자기감정을 추스를 필요가 있다.


시선이 쏠려 질문이 날아들 때 요즘은 간결하게 설명하는 편이다. 사는 일 중에 예상대로 되지 않는 게 수두룩하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함부로 추단하여 섣불리 말하는 것도 자제한다. 때론 답을 하려다 굳이 말할 필요 있나 싶어 회피하는 순간도 있다. 그 순간 잘했다 싶을 때가 더 많다. 한 걸음 물러서 덜고 통과하다 보니 쓸데없는 말이 점점 분해된다. 말없이 듣기만 할 경우 간혹 아픈 사람이나 삐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도 있지만 듣는 사람으로 남는 것이 갈수록 편안하다.


듣는 일이라고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며 적당한 추임새로 대화를 북돋워야 한다. 잘 듣고 무리없이 반응하려면 자기 성향 파악하고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해석 방식에 따라서도 기분이 달라지므로 다양한 시각을 가동해야 덜 상처받는다.


싱그럽던 시절을 지나 삭은 고무줄처럼 늘어진 시절에 닿았어도 내면의 깊이가 부족한 탓인지 어떤 말에선 아직도 기타 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감정의 굴곡은 언제쯤 단조로운 해안선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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